'나는 누구인가?'
과거로부터 '나', '자신', 그리고 '존재'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중요한 관찰과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속 시원한 정답을 찾은 사람이 지금껏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는 말을 했다. 그는 오랜 성찰 끝에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최고의 현자라 일컬어졌지만, 그는 결국 인간은 무지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데까지만 도달할 수 있었다.
16세기, 데카르트 역시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누구인지 의심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의심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는 말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확인한 것일뿐, 그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되려 그의 이 명제는 사유와 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주지주의'의 빌미만 마련했을 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자아'가 강조된 사회
오늘날의 사회를 흔히들 '포스트 모던 사회'라고 부르지만, 사실 '포스트 모던'에 대한 담론은 1980년 대부터 시작된 식상한 용어라 할 수 있다.
'탈 구조화된 세상.'
'모든 사람의 개성이 부각된 사회.'
허나 오늘의 사회의 특징을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지점에서는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담론이 비로소 사회 전반에서 실현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 모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의미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중이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사회와 집단에서 단절되었던 경험은 이런 '개인화'된 사회로 변모, 아니 정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비단 부정적인 의미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각종 방송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대박의 시대는 가고, 완판의 시대가 온다"는 말로 향후 한국사회 풍토를 전망했다. 이 말은 과거에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더 많이' 파는 것에 치중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스스로 정한 '내 목표'의 달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말이 된다.
어느 지점에서 보면 '개인화'가 가져오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사실 그런 매력적인 장점이 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 주류가 되는 것이겠지.
세련된 트렌트가 된 '명상'
그러고 보면, 최근 몇 년간 '마음수련, 마음코칭, 자기 발견하기' 같은 주제의 글들과 서적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마음에 상처가 많다는 반증이다. 과거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최우선 과제, 위기가 '육체적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 사람들이 다루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마음, 정신적 치유'에 있는 모양이다. 더더욱 '나' 자신에 대한 앎과 탐색 욕구가 강조된다. 과거 현자와 사상가들의 주제였던 '나'는 어느새 일반 범인들의 주제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과거 인도에서 '도, 진리'를 깨닫기 위한 정신 수양 방법이었던 '요가'나 '명상'이 스포츠가 되고 문화적 트렌드가 된 모양새다. 크든 작든 거의 대부분의 피트니스 센터에는 꼭 요가 클래스가 하나쯤은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핫요가, 플라잉 요가, 종류도 많다.
이는 물론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 소위 '인플루언서'들이 시작했다. 여전히 신화라 불리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요가'와 '명상'을 통해 자신을 수련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혁신가들 역시 '명상'을 중요한 기업의 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곧 대중에게 퍼졌다. 심지어 뇌과학자들까지 명상이 뇌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결과를 속속 발표해내자 이는 삽시간에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돈이 되는 '명상', 죄악시하는 기독교
스포츠가 되고, 문화적인 트렌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명상'이나 '요가'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활동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명상의 목표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자신의 호흡,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나'에게 집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시된다. '죄'의 시작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집중하는 것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사실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나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죄는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나'를 강조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명상'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비단 죄악 된 세상에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돈을 만들어내고 싶은 기업이 고려하는 최우선 조건은 누가 뭐래도 이윤이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에서 '명상'을 장려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효과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품성이 담긴 세상, 하나님을 닮은 인간
답답한 일상에서 주말이면 이따금 야외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산행을 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 조용한 숲길을 걷거나 들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에서 익숙함과 잠잠함을 경험하곤 한다.
뿐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현상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영감을 받곤 한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좋아하여 자주 썼던 말이란다. (그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도전을 받고,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강물은 당연하게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이것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라고 이토록 평범한 자연현상에 사람들은 놀라워하거나 영향을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품성이 담겨 있고, 사람은 하나님의 품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그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셨다(요한복음 1장).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하나님이 담겨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창세기 1장)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다.
물론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연도, 사람도 어느 정도는 손상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품성이 담긴 자연에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평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명상: '나'에게 집중하는 것,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내면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은 어느 면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관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과 자연에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느끼고, 더 깊이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옛 속담에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저장음식의 대부분은 발효식품이다. 그 과정에서 몸을 이롭게 하는 익균이 만들어지면 '발효'라 하고, 유해한 균이 만들어지면 '부패, 썩음'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발효의 과정은 심히 번거롭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을 담그지 않는 집은 없다. 썩는 게 무서워서 김치를 담그지 않거나, 고추장이나 된장 먹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꼭 이와 같다 싶다. 깊은 고요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교감, 대화하는 시간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에서 익숙한 '기도' 역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행하는 마법주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대화와 교제는 언제나 쌍방의 주고받음으로 이루어져야 옳은 것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의 기도 방법은 너무 한 곳에 치중되어 있는 듯하다.
물론 기성교회가 가진 염려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눈에 보이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고 하지 않는가? 이단이라는 말 역시 '끝이 다르다'는 뜻이다. 사탄은 언제나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비틀고 왜곡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려한다. 최초의 인간도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이리라"던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비튼 것에서 최초의 죄를 범했지 않던가? 분명 '자신에 대한 관찰과 집중' 역시 충분히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으로 도치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위험성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것은 옛날 다니엘이 환상으로 보았듯이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계실 거룩한 곳에 올리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분명히 무서운 일이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될 행위이다.
그러나 이는 자칫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좋은 수단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하는 명상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춰지지 않으면 된다. '무한한 자아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면 된다. '자기의 발견을 통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중심이 있으면 된다.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신뢰하지만, 동시에 '나의 가능성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 모든 일에는 자비(사랑)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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