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부모도 커야만 한다.
안타깝지만, 아이의 성장만큼이나 부모의 성장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라지는 법은 없는 듯하다.
딸아이들을 키울 때는 이 정도까지인 줄 몰랐는데, 특히 막내아들을 키우면서 내가 부모로서 자질이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나와 '너무나도 꼭 닮은' 우리 아들이 칭얼대거나 흥분하거나 사고를 칠 때면, 나도 덩달아 같이 흥분하곤 했다. 답답하거나 화가 잔뜩 나서 아들을 혼내곤 했었다. 나와 너무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어서 빨리 고쳐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매 대기를 꺼리지 마라. 매질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아이에게 매를 대는 것이 그를 죽을 자리에서 건지는 일이다." (잠언 23:13~14)
모든 아이에게 회초리를 대라는 말은 아니겠지만,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데에 '훈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두고 있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부모는 아이를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내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리라. 나는 아들을 단호한 훈육을 통해 그의 잘못을 고져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들은 혼나고 다시 잘못을 저지르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변하는 것 같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엄한 훈육이 아들에게 '먹히지 않음'을 알고도 계속 그렇게만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예전에 나의 어머니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떤 사람의 아내는 99가지 잘하는 것과 1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아내는 99가지 미운 것과 1가지 잘하는 것이 있었단다. 첫째 사람은 아내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을 고쳐주면 '완벽'하겠다 싶어 부족한 것만을 지적하며 강조했고, 둘째 사람은 지금 아내가 잘하는 것을 강조하여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단다. 결국 시간이 많이 흐르고 둘을 보니, 첫째 아내는 그 잘하던 것까지 이전만 못하게 되었는데 둘째 아내는 잘하던 것에 더하여 부족한 것을 많이 고쳤더란 말이었다.」
이는 내가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배웠던 사회복지사의 '강점관점(Strengths Perspectives)'과 비슷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들이 뿔난 태도를 조금이라도 취할라치면, 내가 기대하는 아들의 모습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모습을 아들이 조금이라도 보여주면, 엄청난 칭찬과 격려, 찬사와 감사를 쏟아보내주었다. 우리 아들은 훈육보다는 칭찬을 먹고사는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아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모난 모습이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잘 없다. 각 사람에게 맞는 약은 따로 있다.
우리 첫째와 둘째는 훈육하면 잘 알아듣고, 고쳤다. 별로 훈육할 것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막내는 조금 달랐다. 훈육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 나빠진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큰 도움은 안되었다. 하지만 막내에겐 '칭찬'과 '격려'가 확실했다. 그게 막내에게 맞는 약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만이 옳은 방법은 아니다.
본성은 다듬어지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것은 실은 '어른'이라 꼬리표가 붙은 나 또한 마찬가지고.
자녀의 잘못한 부분에 대한 것은 부모로서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것은 부모가 스스로 100% 완벽하지 않음을 스스로 믿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훈육을 꺼려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모는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늘 상기하고 반추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자녀의 중요한 덕목은 부모에게서 '순종'의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여하간, 그렇게 아이를 훈육하려 할 때조차도 이전처럼 곧바로 혼을 내지는 않는다. 아이가 이전처럼 또 미운 모습을 보일라치면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훈아, 아빠는 너를 혼내기 싫은데. 네가 자꾸 이렇게 행동하면 아빠가 결국 혼내야 하잖아.
시훈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니 아들이 알아듣는다.
"알겠어요, 아빠. 이젠 그렇게 안 할게요."
감사하고, 놀랍다.
문득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믿고 알았던 하나님은 언제나 '무서운' 하나님이셨다. '심판'하시는 분이셨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본성은 순전한 '정의'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무서운 벌을 자주 내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어릴 때 성경을 보면, 그런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 무섭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오늘 아들에게 "아빠는 혼내기 싫은데, 네가 그러면 혼내야 하잖아."라고 이야기하면서 문득 하나님이 떠올랐다.
'맞아. 하나님도 혼내기 싫으실 거야. 그런데 어쩔 수 없어서 그러신 거겠지. 하나님은 악한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분이시니까. 사람의 노력만으로 도무지 깨끗해질 수가 없으니까, 스스로 대신 죽어서 가면서까지 깨끗하게 해주시려고 했던 분이시잖아? 하나님도 우릴 혼내긴 싫으실 거야.'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혹 실수를 해도 오래오래 참으시다가, '어쩔 수 없이' 훈육이 필요할 때는 최대한 짧게 하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이 있거나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크게 크게 부풀려서 천 대까지 칭찬하고 상을 주시는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만을 강조하며 죄짓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 같이) 꼭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성은 악이 없는 순전한 '정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도 덜 고통스러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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