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5년. 돌이켜보면 정말로 무모한 결정이었다. 8년간 일하던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전세금을 빼고, 모아둔 전 재산을 찾아, 당시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이던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모든 가족이 함께 독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물론 언젠가 독일에서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직서를 내기 전 대략 3개월 전부터 남산 자락에 있는 괴테 문화원란 곳에서 주 2회 독일어 어학과정에 참여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가장 기초단계인 A1.1에서 A.1.2를 넘어가려는 시기였던 것 같다. 독일어 공부를 어느 정도 해봤던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우린 그 정도 수준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무모했다.
독일에 어떤 도시가 있는지도 채 알지 못했다. 단순히 인터넷에서 웹서핑을 하루 이틀 했다. 당시 내가 청소년 교육단체에서 일했던 터라, 경험교육에 관한 학과가 있는 학교를 찾았는데, 딱 한 곳이 나왔다. 물론 나의 정보력이 부족했던 것 때문이었겠지만, 당시로선 하나라 다행이다 싶었다. 굳이 머리 싸매고 고민할 것 없이 그리로 가자고 결정했다. 지금 내가 있는 마부르크라는 도시이다. 단순하고, 무모했다.
그러나 집이 구해진 것도 아니었다. 대학교 원서를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입학 허가를 받을 것이라 믿었고, 퇴사를 하고, 집을 정리하고, 비행기표를 샀다.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기 일주일 전, 독일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줄 수 없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나마 있던 조악한 계획마저 시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단순하고, 무지하고, 무모했다.
물론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이유는 있었다. 줄줄이 나열해 가며 설명하기에도 지루하고, 굳이 변명처럼 이유를 설득할 필요성조차 없지만, 요약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한국의 많은 상황들에서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고 해두면 적당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유일한 합리적인 이유인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었을 뿐. 당시 나의 상황을 비유하자면, 스스로 절벽으로 내몰고, 돌아갈 다리마저 끊어버린 채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형국이었다.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인생은 역설이다. 약점은 이따금 강점이 되기도 한다. 크게 재지 않고 단순하게 고른 도시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좋은 사람들을 만나 큰 도움을 얻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집을 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학비자를 받지 못했지만, 어학비자를 받을 수 있다. 주 5일 독일어를 배운다는 목적으로 비자발급이 가능했다. 물론 어학비자로 모든 가족의 동반비자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고 당당하게 어학비자로 동반비자를 요청했다. 그리고 돼버렸다. 무지함은 용기로 치환되어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3개월 뒤,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다시 마음을 잡고 시작하려던 찰나 또 다른 일격을 맞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절망 속에서도 감사는 있었다. 어학원은 모두 문을 닫았고, 나는 어학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전에 신청해 둔 비자는 다행히 통과가 되었고, 상황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무리 없이 독일 거주가 가능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고립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독일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커뮤니티와 단절되며 아이들은 독일 문화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란한 5년이 시간이 지났다. 2년의 코로나 팬더믹도 그 속에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나름으로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에 다다르지 못했다. 다만 금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 연금술사들이 비록 금은 얻지 못했지만, 다른 값진 발견을 했던 것 같이 우리도 생각지도 못한 다른 결과물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여전히 독일에 있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경험교육에 대한 학위는 아니지만 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학위를 받았다. 아내는 자신의 사회복지사 자격을 독일에서 상호인증받고자 시도했고, 이제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 지금은 독일 청소년 관련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중이다.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이던 아이들은 이제 일곱 살, 아홉 살, 열한 살이 되었다. 아이들 모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을 얻었고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독일에서 자신들의 친구들과 계속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이것에 대해 사실 우리는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하간 아이들 덕분에 우리의 독일에서의 삶은 그래서 더 길어질 예정이다. 처음 표면적으로나마 유학이 목적이었다면, 이젠 실질적으로 양육이 주 목표가 되었다.
계획 없이 시작한 독일의 삶이기에, 미처 예상치 못했던 많은 것을 배웠다. 준비하지 못했기에 몸으로 삶으로 더 많이 부딪히며 배우고 경험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과 실패가 결과는 아니었다. 비록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을지언정 다른 값어치 있는 것들을 얻곤 했다. 이 글은 그런 지난 5년의 실패에 대한 고백, 우연한 성취에 대한 감사의 일기이다. 모두 무모해질 필요는 없지만, 혹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아, 저렇게도 살 수 있기는 하구나. 내가 그래도 저들보다는 낫구나'와 같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독일생활 & 유학 & 문화 : 자녀교육 > 독일생활 &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집 (독일 크리스마스 집 꾸미기) (3) | 2024.11.26 |
---|---|
독일의 공보험, 사보험 // 어떤 보험이 좋은 보험인가? (9) | 2024.11.13 |
(횡설수설) 맨인유럽 (0) | 2024.04.01 |
[독일부활절#03] 부활절(Frohe Ostern!!) - 파티 & 놀이 & 산책 (0) | 2024.04.01 |
[독일부활절#02] 금요일(Kar+Freitag) - 법적으로 파티가 금지된 날 (2) | 2024.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