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고, 내 삶에서 직접 그분의 존재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스스로 느끼고 있던 나의 부족함과 불만족, 열등감 때문이었다.
먼저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성경공부를 좋아한다. 그 시간을 통해 새롭게 어떤 진실의 조각을 발견했다고 느끼게 되면 그렇게 흥분될 수가 없다.
기도를 통해서 (어떤 때는 속이든 겉이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침묵하는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한다. 그때는 어떤 앎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그 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나의 갈망 속에 그 분이 '평안'을 주시는 것 같다.
그 외에도 기도를 할 때면, 보통 인간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이나 '느낌'을 가진다.
다만, 어떤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오로지 답답한 침묵만이 나를 감싸고,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 때도 물론 자주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아무것을 공유할 수 없었던 그때조차 그 분과 '대화했던' 기도 시간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찬양을 통해서는 내 감정과 상황을 그 분께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흥분, 기쁨, 감격' 뿐만 아니라 '슬픔, 두려움, 갈망', 혹은 '죄송함'까지... 여러 감정들이 찬양에 담기곤 한다.
나는 자연 속에서 임시적인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는 '캠프(Organized Camping)', 특히 크리스천 캠프 사역을 8년 정도 진행했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나는 '자연(Nature)'을 통해서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흐르는 물을 바라볼 때 문득 하나님께서 내게 '물처럼 살라'고 하신다고 깨닫는 것이다. 혹은 너무 힘들 때, 솔솔 이는 바람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위로하시는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별스럽지 않은 개인의 경험, 또는 연약한 자기암시에 불과한 것 뿐인지 혹은 정말 하나님께서 이 자연과 자연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사람과 교제하시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말을 시작하면 설혹 너무 길어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사실 이 '자연'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하나님의 조각이 담겨있다.
한자로 자연은 '自然'이라고 쓴다. 이 말은 중국의 사상가 노자가 쓴 도덕경이란 책에 등장하는 단어인데, 단어의 본 뜻은 '스스로 그러하다, 스스로 존재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自然)이니라." (출3:14)
성질이야 더 깊이 따져봐야겠으나, 적어도 그 단어의 뜻만 보면 이 자연은 곧 하나님이라 말할 수도 있다.
다른 성경구절을 살펴볼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성이시다. 하나님 자신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러나 말씀 자체에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있음도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그 말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 세상, 자연에도 역시 하나님의 본성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더라도 백번 양보하여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어쩌면 사람들이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자연 속에서 평안함과 만족, 기쁨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지어진 피조물이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에서 느끼는 동질감, 본능적인 끌림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하나님이 지으신 여러 세상을 여행하고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더욱 입체적으로 키워준다고 믿는다. 자연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방금 공유했다.
세상은 여러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로 나는 지금 독일에 살고 있는데, 한국의 자연과 독일의 자연만 비교해도 그 모양이 다르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여러 성품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26. 높은 하늘? 아니, '넓은' 하늘!
항상 하늘을 볼 여유를 꿈꿨다. 개인적으로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 중 하나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일상의 빠르고 루틴한 시간들에 적응하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이 치열한 경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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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수 시간 후 날씨를 쉽게 가늠하곤 한다. 예를들어 지금은 해가 쨍하니 비치는데, 대뜸 나를 보고 '한 시간 뒤에 비가 올 것 같네. 지금은 산책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하거나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려 지붕 처마에 비를 피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곧 비가 그칠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분들은 정말 날씨를 정확하게 맞춰버리신다.
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독일 하늘이 넓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를 가늠한다. 독일의 하늘은 넓어서 멀리 있는 하늘의 모양을 상대적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의 좁고 높은 하늘을 볼 때는 상상하기 힘든데, 여기서는 가능하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인생에서 또한 지금 경험하는 하늘의 존재 만큼이나
멀리 있는, 다가올 하늘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인생이 고난을 겪고 있는가? 마치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늘이 비를 쏟아붓는 것처럼?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다. 여전히 저 멀리 하늘에는 푸른 빛의 투명한 하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하늘은 곧 나에게 다갈 올 터이다. 그것이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한국에서는 그 하늘이 산에 막혀 존재조차 잘 보이지 아니하나 독일 하늘을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현재의 폭우 속에서도 햇빛이 찬란한 하늘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8)
항상 글이 생각만큼 잘 써지지 않는다. 매번 용두사미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머릿속에만 맴돌고 있던 사념의 조각을 밖으로 끌어낸 것만큼의 의미는 있다고 여기어 진다. 어찌 되었건 오늘도 여러 모습으로 나를 만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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