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2장 16~22절 |
그들이 발람에게 가서 말을 전하였다. "시뽈의 아들 발락의 전갈입니다. '나의 청을 거절하지 말고 부디 와주시오. 잘 대우해 드리리다.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해줄 터이니 부디 와서 이 백성을 저주해 주시오.'"
"발락이 그의 궁궐에 가득 찬 금과 은을 준다고 하여도 나는 갈 수가 없소.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나는 절대로 나의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어길 수 없소. 그러나 하룻밤만 여기에 묵어보시오. 야훼께서 다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알아보리다."
그날 밤 하느님께서 발람에게 오시어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다면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 고관들을 따라 나섰다. 하느님은 발람이 가는 것을 보시고 몹시 화가 나셨다. 야훼께서 보내신 천사가 그의 길을 가로막고 섰다. |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발람이란 선지자의 이야기는 볼 때마다 (실은 아직도) 언뜻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성경본문을 보면 발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때문에 하나님께 먼저 질문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압의 왕 발락이 두어 차례 사신을 보내 청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을 보면 발락은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나는 절대로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어길 수 없소!" 그는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알았던 사람이고, 그 말씀을 따르려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이 너를 부르러 왔다면 같이 가거라."라고 허락해주셨다. 그 말씀을 들었기에, 다음 날 아침 발람은 자신의 나귀를 타고 발락에게로 떠났다. 그런데, 방금 발람의 떠남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발람의 떠남을 보고 무척 화가 나셨다. 그리고는 발람이 가는 길목에 당신의 사자를 보내 그를 죽이고자 하셨다.
나는 이 부분이 매 순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직접 허락하셨으면서 왜 그 말씀을 따라 막상 가려고 하니 화를 내시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신 것이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고자 이집트로 떠났던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일이다.
출애굽기 4장 24~25절 |
이집트로 가는 도중 어느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려고 하셨다.
그러자 그의 아내 십보라가 날카로운 돌을 주워 가지고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참으로 당신은 나에게 피의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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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집트로 가는 것을 원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능력을 선물하시고, 돕는 자를 약속해가시며 이집트로 떠날 것을 재촉하셨던 사람이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먹은 사람이 이제 막 그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이제 막 시작하려는 마당에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 '죽이려고' 하셨다. 왜 그러셨단 말인가?
이후 십보라의 행동을 통해 그것이 아들의 할례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어도 나에게는) 이 의문이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은 솔직히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는 할례와 관계된 것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금의 우리는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당시 하나님과 모세, 모세의 아내 십보라 사이에는 분명하게 서로 알고 있는 나름의 이유였겠구나.'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많은 경우 한 개인의 신앙 여정에는 이해나 지식에 선행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이 있어야만 하는 것 같다. 오늘날의 발달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다분히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다시 발람으로 넘어와서 모세의 일과 비교해보자. 모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허락을 듣고 난 다음 모압으로 떠나는 발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이고자 하셨다. 나는 두 경우가 비슷한 경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생각이나 능력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한 대언자,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길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도록 강하게 훈련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이고 가정이지만, 어쩌면 모세는 아직도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모세는 하나님이 화를 내셔서 어쩔 수 없이 떠났으리라. 그리고 오랜 처가살이를 통해 모세보다 어쩌면 아내의 입김이 더 강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나서는 길에 아내가 순순히 이해하거나 지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내 십보라 모두에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이시고,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훈련을 준 것일 수 있다.
발람은 어떤가 베드로후서 2장과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발람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그들은 부정한 소득을 좋아하던
보소르의 아들 발람이 간 길을 따른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장)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란한 짓을 하도록 가르쳤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
우선 발람은 부정한 소득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모압 사신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눈 앞에 이익이 탐이 났을 수 있다. 그랬기에 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하룻밤만 더 머물라고 권했을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발람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그랬기 때문에 도리어 보내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재물을 좋아하는 발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까 봐 시작부터 죽음의 고비를 통과하도록 하신 것 아닐까? 오로지 하나님께서 넣어주는 말씀만 전하도록,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화가 임한다는 것을 초장부터 분명하게 고지하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시록의 발람에 대한 평가도 박하다. 본문을 보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쳤다고 되어있다. 내 생각에 이는 발람의 세 번째 축복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을 야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전처럼 징조를 찾아 나서지를 아니하고 그대로 광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민수기 24장 1절)
하나님의 온전한 대언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보내심을 입었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대언자로서만 역할을 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만이 전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자신의 뜻대로 임의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매 순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물론,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자주 숨겨져 있다.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 침묵하시는 듯 보인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것이 불필요할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들리든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도서에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되, 심판자이자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라'(전 11:9)고 되어있지 아니한가?
지금까지 독일로 떠나오고 정착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가능했다. 독일 유학을 준비할 때,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한국 지인들이 이를 걱정해주었고, 불가능을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99% 확실한 진실이었다.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으나 독일에 와서 하나하나 해결해가면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무모한 길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1%의 가능성을 기적과 같이 지나가게 해 주셨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신앙심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선하심일 뿐이다. 부지하기에 인식하지 못할 뿐, 누구나 그런 길을 걷고 있으리라. 나도 이렇게 극명한 사건들 속에 없었다면 분명 모르고 지나갔으리라 확신한다.
최근에 마음이 어려워 짐을 느낀다. 아마 현실이 어떠한지 조금 더 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께 값 없이 받은 복을 더 받아내고, 그뿐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내 것으로 취하고, 미래를 위해 저장하고 싶어 지기 때문인 듯하다. 하나님은 내게 마음을 심어주시거나 말씀을 통하여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고, 너무 현실적인 고민에만 몰두하지 말라고' 말하시는 듯하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 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더 자라 가라고 말하시는 것 같다.
만물이 주의 것이니 우리가 어떤 것을 더 성취한다고 주님 앞에 가치 있는 것이 될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에 더 자라가 길 소망할 뿐이다.
나에게도 발람과 같은 태도가 있다.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내가 주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내어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날마다 주님 앞에서 나를 부정하고, 나의 자아를 죽이며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주님,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이 여기 당신 앞에 섰습니다. 죄의 사하심을 얻고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돌아봐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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