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선택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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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선택의 기준

by 독/한/아빠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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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날짜: 2019년 8월 12일(월)

묵상본문: 창세기 25장~30장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아브라함 때에 있었던 것만큼이나 극심한 흉년이었다. (중략)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중략)

"여기 이 땅에 머물러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겠다. (창26:1~2) 

 

이삭이 그 땅에 곡물을 심어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 (중략)

마침내,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했다. "떠나시오. 당신은 너무 커져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겠소." (창26:12~16)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라. (창26:24)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 바로 앞에서 말씀하셨다. (중략)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28:13~15)

 


 

삶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그 때에 나는 어떤 기준으로, 혹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상황을 파악하고, 내 앞 길의 방향을 선택하고 있는가?   

과연 힌생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을까?

 

내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 나는 현실적이거나 효율적으로 처신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싶다.

한국의 직장을 떠나 모든 가족과 함께 독일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오늘 나의 하루도 나의 그런 부족함의 어디쯤에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이들이 나의 이러한 결정의 과정을 바라보면

무책임하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할 여지도 있음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 독일유학을 준비할 때,

나의 모교 교수님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교수님께 하나님께서 독일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만큼 형통한 상황을 만들어 주셨는지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교수님 께서는 한 참을 들으시다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대범 형제,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형통하다고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답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내 속을 깊이 울리는 진동이었다.

그렇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현상의 해석'이 반드시 하나님 뜻에 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역대급의 흉년을 접할 때면 더 늦기 전에 그 땅을 벗어나자고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라 쉽게 말할 수 있다.

실은 이삭도 그렇게 했다. 그 땅의 주인인 아비멜렉을 찾아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곳에 남으라 하셨다.

그 어려움을 몸으로 부딪히면 더 큰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삭은 선택해야만 했다.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약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경험과 사리판단에 맞추어 가장 효과적인 선택을 내릴 것인가?

 

본문에서 이삭은 순종했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많은 소유를 얻게 되었다.

(단편적으로) 이삭은 순종을 통해 '복을 받았다' 말할 수 있는 상황적인 형통 또한 얻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역설적으로 이삭은 그 땅에서 쫓겨났다.

중국의 고사인 '새옹지마'는 어쩌면 기독교적 진리를 잘 보여주는 말일 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이는 단편적인 형통은 하나님의 복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형통 또한 하나님을 복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 앞에 보이는 상황적인 형통이 아니다.

'오늘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에 대한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삶을 판단하실 전능자 하나님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고 있는가?'(전11:9)에 대한 부분이다.

 

상황은 (단편적으로) 형통하게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선택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엔 아쉬움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에 도달할 수 없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노력하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지만

반드시 그런 영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 그런 태도를 구하는 시작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런 시각을 견지했는가? 그런 선택을 내렸는가?'와 같은 성취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그런 선택을 내리고자 했는가?'와 같은 삶의 태도, 방향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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