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비키니'에서 '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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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비키니'에서 '죄'까지

by 독/한/아빠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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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9일의 일기

 

여름 캠프를 모두 마치고, 가족 휴가를 삼척으로 다녀왔다.

 

휴가 며칠 전에는 원인모를 불안한 마음으로 어려움도 겪었다.

실은 아직도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르겠다.

아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일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여하튼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찌꺼기가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휴식이 필요했고, 그 휴식을 가졌다는 것에 감사한다.

말 그대로 '쉼(休)'에 집중한 휴일이 필요했다.

그런 휴가를 보내기 위해 삼척으로 갔었다.

삼척 바다는 아름다웠다.

또한 어린 자녀들이 놀기 적합한 호텔 워터파크도 매력 있었다.

그 곳에서 문득 머리를 비집고 들어온 하나의 주제가 있었다.

 


생각의 시작은 우습게도 '비키니'였다. 남자들이란!

차로 이동하는 중 아내에게 말을 꺼냈더니 무척이나 웃어댔다. 민망하게시리.

어쨌든, 이왕 말을 시작한 김에 끝까지 이어 가보겠다.

 

여름 해변이나 워터파크를 둘러보면 여러 여성들이 비키니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여러 남자들도 상의를 탈의하고 하의 수영복만 입고 다닌다.

그런데 비키니를 비롯한 수영복이라는 것이

남성의 것이든, 여성의 것이든 외관상으로는 볼 때는 속옷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노출이 많은 옷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물론 이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으나)

자신의 속옷이 노출이 되면 사람들은 부끄러워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수영복을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재미있지 않은가?

외관상 비슷한 두 종류의 옷이 전혀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수영복은 보여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당연한데, 이 당연한 사실에서부터 우습게도 내 생각은 시작이 되었다.

'도대체 왜 그렇지? 외관은 무척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인식을 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장소'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영복은 보여주어도 무방한 옷이다.

상황적으로 적합한 복장인 것이다.

수영복은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변에도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복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노출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적합하고, 장소에도 적합한,

어떤 의미에선 '일상적'인 옷인 것이다.

 

비슷한 결의 연장 선상에서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보면,

착용자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번에는 한 번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미처 수영복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은 자신의 속옷을 입어야 했다.

남성은 수영복과 비슷한 팬티를 입었고,

여성은 비키니와 비슷한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었다.

장소, 상황은 동일하다.

수영장 또는 해수욕장이고, 주변에도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활개 한다.

이 때 이런 속옷을 입은 사람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별로 부끄럽지 않았을까?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나의 생각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속옷을 입은 사람들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도때체 무슨 차이 때문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그 옷의 재질이나 노출의 수준과 같은 외관이 아니었다.

물론 전혀 아니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이 경우, '적합성'과 '수치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한 개인의 '인식'이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부끄럽다, 아니다'의 기준,

그 '인식'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수영복과 속옷은 모양이 비슷하다.

(현실에선 그렇지 않지만) 비슷한 재질이라 가정하더라도

어떤 한 개인에게 그 옷이 속옷으로 인식되었다면,

그 사람은 절대 수영장에 그 옷을 입고 올 수 없을 것이다.

즉, 그 옷의 착용자의 '인식'이 달라진다면,

그것으로 인한 경험과 감정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생각도 나에게는 충분히 재미있는 주제였다.

그런데 '생각'에 달린 발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이어가다 보니 완전히 엉뚱한 데 도착해 있었다.

비키니로부터 시작한 나의 생각의 주제는

'죄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까지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죄'라는 것도 '명명(命名)'되어지는 것이다 싶었다. 

그러니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에는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롬 3:20)'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준에 따라 '판단(명명)'되고 '인식'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까 '죄'는 결코 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기준(존재)를 통한 도움(인식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복잡한 말이니, 다시 예를 들어보자.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

 

이것은 죄인가?

그래, 죄라는 어감이 다소 무거울 수 있으니 바꾸어보자.

이것은 부끄러운 것인가?

 

한국의 상황에서 보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어느 경우에서는 불법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아니다.

독일에서는 집 안이든, 길거리든, 어른 앞이든 자연스럽게 담배를 태워도 된다.

이런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불법도 아니고, 심지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행위인가? 부끄러운 일인가?

어떤 행위 자체로 '선악'이나 '수치심'의 유무를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을 '판단'하는 '인식'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것은 마치 '속옷' 자체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삼을 충분요건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죄'란  결국엔 '인식'으로 비롯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죄가 죄인 줄을 '인식'하지 못 할 때에는 죄를 짓는 사람이 도리어 당당할 수도 있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곳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롯에게 찾아온 천사를 '강간'하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당당히 요구한다.(창19:5)

지금으로 생각하면 '뜨악'할 만한 파렴치한 요청이다. 말도 안되는 요청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행위가 '보편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은 그 말을 들은 롯의 태도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강간'이라는 말에 발끈하거나 법적인 고소를 하는 등의 행동을 않았다.

도리어 자신에게 처녀인 딸이 있으니,

자기 딸을 데려가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한다.(창19:8)

 

아니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가?

도대체 한 사람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인가?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보편적인 상식, 인식'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흠이 되지 않았고, 도리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던 것 같다.

죄가 죄인 줄 모르면 죄짓는 사람이 도리어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The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by. Mathieu Dubus, 1630)


 

성경에는 반대의 경우도 등장한다.

이 반대의 경우는 특별히 종교적 의미에서

'선악'이 철저히 '인식'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예배(worship, 禮拜)'를 예로 들어보자.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가 얼마나 거룩하고 선한 것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것을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세바에서 들여온 향가루먼 나라에서 들여온 향료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너희가 바치는 번제가 나는 싫다. 너희의 친교제도 역겹다." (렘6:2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드리는 예배, 제사가 역겹다고 말하고 계신다.

 

물론 이 경우도 '예배' 자체가 역겨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않은, 

단순히 보이는 것에만 치중한 제사와 예배는 역겨운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도, 그 행위 자체로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다, 선하다' 하겠지만,

그 내면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는 

언제든 하나님께로부터 악하다고 '명명(인식)'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이 경우는 겉으로 볼 때는,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죄악'으로 보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선한 것'이라고 명명되는 경우이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본 환상의 내용이 등장한다.

환상 중에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음식이지만 동시에 율법으로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 뿐인가?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뒤,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관점에서

죄인이라고 '인식'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지 않은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이다. 한 개인, 혹은 사회가 공유해야 할 '내적인 판단의 준거', 즉 '인식'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히틀러 암살 모의에 참여했던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어제 '겉'으로 참이었다고 해서 반드시 오늘도 참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겉에 포장을 걷어내고 보이는 '본질, 태도, 인식'이다.

그것을 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언제든 '죄'를 '죄'로 볼 수 없고, '선'을 '선'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본질은 행위를 넘어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준'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아쉽게도 나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정의하고 정리할 수는 없다.

그 누가 하나님과 '같은(혹은 비슷한)' 진리의 기준을 가질 수 있을까?

 

다만 성경에는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마7:8)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하는 자가 받는다.'

즉, '하나님의 뜻, 내면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다소간에 그 의미의 자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결절은 틀릴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당 부분은 틀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역시 '겉'이 아니라 '속(본질)'을 '인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너그러이 우리 겉의 '잘못'을 용납하여 주시리라고 또한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겉을 관통하여 본질을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발버둥'이다.

우리가 어제의 죄를 오늘의 죄로 여기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어제의 선을 오늘의 선이라 착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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