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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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by 독/한/아빠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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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9일의 일기

 

본문 말씀보기 (행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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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만일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과 금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베드로와 요한에게

은과 금이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측은지심이 있어서,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을

도와주고자 했더라면,

과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은

오늘의 본문처럼

걷고 뛸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에서

이 순간 걷고 뛸 수 있도록 하시고자

마음먹으셨다면 그랬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늘의 본문에서와 똑같이

그 걷지 못했던 자에게

일어남을 "명령"했을 것이고,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에게 은과 금이 있었고,

그들의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불쌍해 보이는 그 사람에게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했었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아마

그 걷지 못했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평소와 다름없는,

혹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은화'나 '금화' 몇 닢을 얻는

그저그런 하루를

보냈으리라 생각된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금과 은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런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부족함' 또는 '온전치 못함'을 통해

도리어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시는

사건들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많이 가져야 많이 나눌 수 있다.

더 많이 알아야 더 많이 가르칠 수 있다.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무결(無缺)한 것이 더 온전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다보면,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55:8-9)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난다.

하나님 안에서는

약한 것이 약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 도리어 강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7~10)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 messenger of satan)를

제거해달라고 간구한다.

성경엔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완전히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음 밖에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았고,

생명은 물론 다른 귀한 것조차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이 세 번씩이나

제거를 위해 간구했을리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그런

평범한 약점도 아니었다.

사탄이 심어놓은 사자라고

말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걸림이 되는

약점이었 던 것 같다.

아마 바울 스스로도 두려워하고,

자신 없어했던 것 같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흠이 없길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흠을 제거해달라고 빌었다.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의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사람의 방법으로,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의 계산으로는

'완전무결하고, 무오한 것'이

온전함인 것 같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족하고,

약하고,

흠이 많은 것이

도리어 온전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귀하고 감사한 말씀이긴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아멘'으로

쉽게 동의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간적인 부족함이 존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약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은

희망을 가지게 해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어려움은 바람직한 것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부족함이 온전함을 위한 선행조건이라면

우리는 온전함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부분은 단편적으로

'옳다, 그르다'로 나눌 수 없는 듯 하다.

이는 마치

'믿음을 통한 구원',

'구원을 증명하는 행위'의

주제와 비슷한 논쟁인 것 같다.

즉, 중요도와 순서처럼

다각도로 세분화하여 따져야할 주제인 듯하다.

자세한 것은 또한 추후에 정리하겠다. 

이미 본 주제에서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걷지 못했던 지체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만큼

지독한 가시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손에 있을 때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이되고

부족한 것이 온전한 것이된다.

오늘 나의 삶에서도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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