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지역아동센터의 한 선생님과 연이 닿았다.
그 분 역시 청소년 현장에서 오래 일하신 분이셨기에 몇 차례 깊이 있는 질문과 고민이 오고 갔다.
선생님께서는 특히 독일의 사회, 교육체계와 청소년 현실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으셨다.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던 소회를 간략히(?) 정리해보고 싶다.
일단 기뻤다.
한국의 누군가가 아직도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비록 별 것 아니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참 좋았다.
둘째로 감사했다.
내가 있는 곳, 이 독일 땅이.
현실로 살아가기에 어려움과 불평이 먼저 보이던 근자였기에...
누군가에겐 현실의 약점이 아닌 아닌 꿈에 그릴만큼
기대할 만한 장점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 많음이 상기되었다.
내게 먼저 연락을 해오셨던 그 분은 워낙 청소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고,
그만큼 본질적인 고민을 하시는 분이셨기에 그 분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나 또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내 생각과, 이 곳의 현실에 대해 곰곰이 반추해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여전히 놓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분의 질문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혹시 독일 청소년들은
자기자신이나 사회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이나 고민을 하고 있는가요?"
제가 예전에 북유럽 연수 갔을 때, 그곳 아이들
세계평화, 환경보호, 인권 같은 꿈을 꾼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독일 청소년들도 혹시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물론 이 질문도 참 흥미로웠지만, 나는 그 다음 질문에 꽃혔다.
"요즘 우리나라 청소년들과는 다른지 궁금하네요."
물론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갈망은
때때로 내가 가지지 못한 현실적 불만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듯 싶다.
그런 생각에 닿은 지금 이 질문의 질감은 까끌까끌,
편안하게 삼켜 소화하긴 쉽지 않지만, 그대로 굳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해본다면...
<독일 청소년들은 다른가?>
더 정확히, 그 매끄럽지 않은 질문을 오롯이 삼켜 다시 토해내면...
<독일 청소년들은 우리나라 청소년들과는 다른가?>
여러 단초들을 붙이고, 어떤 점에서는 제한점을 적시해야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그래, 다를 수도 있다>라고 나는 대답하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난다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만 남긴다면...
그것만큼 쓸모없고 속상한 일이 어디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독일(을 포함한 유럽) 친구들은 볼 수 있고,
우리 나라 청소년들이 꿈꾸지 않는 것,
아니 꿈 꾸지 못하는 것들을 그들은 꿈 꿀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그들이 태생적으로 우리와 다르기 때문인가?
아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확신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어데 그리 부족한가?
비교란 때때로 무의미한 것이 될수도 있지만,
동시대의 청소년들을 종으로 잘라놓고 보았을 때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능력적으로 어디 그리 빠지는 인물들인가?
물론, 오늘날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직면해야 할
젊은 또래 안의 문제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 문제나 상처가 생각보다 깊음을 알게 된다.
특히 세대간의 단절이나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것이 어디 우리나라만의 문제인가?
이곳 독일 역시 이야기를 하다보면 드러나든 아니나든
미묘한, 혹은 뚜렷한 갈등의 골이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아픔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고 직면한 상처가 아픈 법이다.
때문에...
<요즘 청소년들은...>
<나 때는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기성'의 비판은 물론 타당하다.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별 쓸모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만 한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근무하던 기관에서
매년 말, 청소년 사역사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몇 차례 진행했었다.
나는 아직 그곳에서 만났던 어떤 청소년 지도자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가 비판하기 바빴던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 교육의 어두운 현실을 두고
그는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물론 문제가 있긴한데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잘하고 있는것 같은데요.
더 좋아질 것 같은데요."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시대의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지금까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왔던 동력은 어쩌면...
이런 깜깜하고 막막한 현실 속에서 품었던 누군가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포기 하지 않고 움직이던 어떤 이의 따뜻한 시선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나라 아이들은 생각보다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객관적, 주관적 조건도 많이 있다.
그것은 눈 딱감고 분명하게 한 번 인정해보자.
그런데, 어째서 우리 아이들이 유럽의 친구들 같은 꿈을 꾸지 못할까?
왜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틈'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안정'과 '여유'가 제공되지 않았다.
지독한 경쟁 속에서 도태되면 안된다는 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입받았다.
그 경쟁은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경쟁은 생존 그 자체라 볼 수 있었다.
살기 위해 그들은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발등치만 바라보아야 했다.
타인에게 눈길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을지 모른다.
반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청소년들에게는 사회적인 안정이 보장된다.
그들에게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안정'이 제공된다.
조금 불공평해보이지만, 그들은 어린시절부터 넉넉하고 여유롭다.
소위 '나라를 생각한다'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 혹은 부유층 자제들이 많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방법론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라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 소위 소시민들은
'나라'나 '대의'라는 말을 쉽게 입에서 내뱉기 어렵다.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데만도 모든 에너지와 신경을 쏟아부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스운 이야기기만, 그리고 일면 믿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부는 되물림되고, 특정 계층이 지도자가 되어, 그들이 '위하는' 나라가 반복된다.
아쉽다. 아쉽기 그지 없다.
비록 내 독일의 삶은 짧지만,
그래서 아직까진 이곳의 장점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본 독일 사회를 기술하면...
어떤 것이든 '일을 한다면', 크던 작던 무엇이던
전체 사회라는 큰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써 기능을 한다면',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각 개인의 생계. 즉, '안정'을 담보해주는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는 경제능력. 즉, 돈이 필요하다.
유럽 국가가 사회보장에 쏟아 넣는 자금은 어마어마하다.
국민들은 감히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막대한 조세부담을 져야한다.
우리나라였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터이다.
물론, 유럽에서 그런 불평이 전혀없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럼에도 그 부담을 덤덤이 짊어진다. 그것 역시 사실이다.
국가의 사회보장을 오랜 시간동안 확인하고 체감한 경험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떻게 국민으로써 부담을 짊어졌는지 곁에서 보았다.
그리고 국가가 그들의 노후에 그것에 대해 어떻게 보답했는지 보았다.
주변인의 어제와 오늘의 삶을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내일에 대한 증거로 삼았다.
각 개인은 국가가 담보하는 내일의 '안정'에 대한 신뢰가 깊다.
그리고 오늘 국가가 나에게 지우는 '과중한' 부담과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 결과 그들은 오늘 역시 '안정'을 느낀다.
안정을 느끼는 그들은 비로소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간단하게 '여가'나 '여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이나 '에너지, 힘'과 관련이 깊다.
심리적인 '안정'이 물리적인 '동력'을 가지게 될 때,
현실적인 '변화'를 견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독일은 물리적인 여가와 여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각 개인에게는 이같은 물리적인 기회가 충분히 제공된다.
예를들어 보자. 독일말에 'Feierabend'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루의 모든 일과를 마친 뒤 가지는 '여유있는 저녁'이라는 뜻이다.
매일마다 그들은 홀로 가지는 '틈'과 '여유' 필요로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가치이며,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욕구가 아니라 사회적 공감이 형성된 욕구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는 매일같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리적인 여유'가 제공된다.
왜 유럽 청소년들이 <세계평화, 환경보호, 인권> 같은
거대한 사회와 공동체에까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그들의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아니, 그들에게는 그저 그 '환경'이 있었다.
경제적인 요소를 포함한 심리적인 '안정'이나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경험이 제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마치면 곤란하다.
그것은 개인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으로 지나친 자기 비약 정도로 그쳐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독일보다 못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우리 청소년들이 놓인 삶은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독일의 모습 중 좋은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모든 면에서 100% 정답이라 볼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실제로 우리의 현실 중 비판할 만한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독일이 지금 하고 있는 제도나 방법을 흉내내는 것은 또한 우리에게 꼭 맞는 정답이 될 수도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우습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제에 대한 인정!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오늘의 실천!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낸 오늘의 현실은 절대 비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 우리들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고민과 노력의 결과이다.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제보단 어제가, 어제보단 오늘이 더 나아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제만 바라보면, 문제밖에 안 보인다.
늘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오고, 개선해왔는데...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말이야...>
이렇게만 불평한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어제 나의 모습을 보며, 그제 나의 부모들이 한 숨 쉬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 뿐이다.
잊지 말자.
오늘도 여전히 남아있는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전했고,
우리는 성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일의 오늘과 우리의 오늘에 대한 비교는...
새로운 경험과 지평의 확장으로 보면 족하다.
어제 우리는 독일을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알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직시는 아프지만,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족하다.
그리고 오늘의 고민과 도전, 실천이 내일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을 믿자.
내가 고민하고 있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오늘
고민하고 있다.
우리가 고민하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다른 사람도 함께 고민해 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만나는 또 다른 사람도 함께 고민할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고,
같은 마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포기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성장과 발전한 사회는
어제 누군가가 희망하고,
포기하지 않아주었던 결과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렇게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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