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날짜: 2019년 8월 22일(목)
묵상 본문: 출애굽기 3장~4장
모세가 하나님께 대답했다.
"하지만 어째서 저입니까?
어떻게 제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는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뒤에
이 산,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출3:11~12)
오늘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명령하셨다.
모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사실 모세는 젊은 시절,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고자
여러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 시도는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보며 정리한 바로,
모세는 소위 '이집트 왕족'이었던 때에도
자신의 민족 정체성이 분명했을 듯하다.
출애굽기 1장에는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같은 동족'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계속 등장한다.
어쩌면 모세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한다는
영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모세가 히브리인을 학대하던 이집트인을 죽였을 때,
파라오는 당장에 모세를 죽이고자 한다.
사람을 죽인 일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한 나라의 왕족을 아무 재판 없이 곧바로
죽이겠다 나서는 모양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아마 당시 파라오(람세스 2세일 듯)에게
모세의 존재는 평소부터 거슬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도행전 스데반의 집사의 설교에 따르면
모세는 위대한 장군이고, 전략가였고, 달변가였단다.
거기에다가 분명한 히브리 민족 정체성도 있었다면,
파라오의 반 히브리 정책을 그냥 넘겼을 리 없다.
어쩌면 파라오는 호시탐탐 모세를
축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모세는 이미
히브리인을 구원하고자 했던 시도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파라오에게 대항했다가
죽을 뻔했던 실패의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80세가 되었다.
이집트에서 도망친 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면서
모세는 자신의 지난 삶과 결정을
무수히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 같다.
그것은 그를 더 소극적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내면 속에 갇히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루하루 삶에 만족하는
나름 자족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모세는
지금과 같은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다시 돌아갈 용기조차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라!"
고 명령하신다.
그렇게 젊고, 능력이 있을 때,
큰 의지로 노력할 땐 침묵하시더니,
늙고, 초라해지고,
심지어 이젠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은데,
갑자기 나타나 명령하신 것이다.
모세로서는 당연히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따져 묻는다.
"왜 전데요?"
"정말 제가 할 수 있다 생각하세요?"
"그럼 증거를 주셔보세요."
증거.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여기고 있는데,
아니 사실 굳이 나서서 하고 싶지 않은데,
나의 모든 상식과 욕구를 거슬러가면서
모세가 나서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설명하실까?
'사실 네 몸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었다.
네 이마에 새겨진 흉터가 있지?
네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그 흉터가
내가 처음부터 너를 선택했다는 증거다.'
'히어로물'의 단골 레퍼토리처럼 하실까?
'지금부터 네가 경험할 미래의 환상을 보여주마.
보아라. 지금은 믿을 수 없겠지만
너는 저렇게 이스라엘 민족을 데려올 거야.'
이렇게 환상을 보여주시려나?
어떻게 하나님은 모세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를 보여주시려나?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넌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게 증거다."
엥? 이게 뭐지?
어떻게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물어보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 결과가 달성된 것이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확신이 없어서 못 가겠다.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증거를 달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냥 확신을 가지고 가면 된다.
그게 네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증거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듯 상식적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참으로 많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증거)입니다. (히11:1)"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볼 수 없는 것, 지금 보이지 않는 것,
현재 상황으로서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증거를 구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볼 수 없는 것을 그냥 보라.'
고 말씀하신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달랬더니,
볼 수 없는 것을 그냥 보라 하시는 것이다.
좋아. 여전히 이상하지만 가능 하다치고,
그렇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이라니?
믿는 사람에게 만일이란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부르짖었다.
"제가 믿습니다.
의심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
(막9:23~24)
믿음이란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크다, 작다'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어쩌면 '태도'와 '방향'이 아닐까?
우리에게 만약 그 '믿음'이란 존재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위 사람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아주 적거나, 혹은 아예 없다 싶을 정도로
보잘것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믿고자 했던
그 태도와 방향성을 '믿음' 자체로 인정해주셨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계신지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자 노력하는 나를,
믿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발버둥 치고 있는 나를,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자로 여겨주신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가졌든,
혹은 믿음을 가지지 못해 힘들어하든,
그 믿음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되었다.
그렇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 속에 거하고,
계속해서 방황하고,
앞으로도 힘들어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태도가 있기에
그런 우리의 '믿음'이 있기에
이 보잘것없는 상태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고귀하고 놀라운 계획이 실현된다.
그것은 과거 모세 때도 그랬고,
지금 우리의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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