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불확실&믿음 #.02: "불확실", "불안정"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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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불확실&믿음 #.02: "불확실", "불안정" 즐기기

by 독/한/아빠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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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불확실&믿음 #.01: 그동안의 믿음이 모두 무너졌을 때... (ft. 엘리사, 수넴여인)

(수넴의 여인이) 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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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다.

그분에게 불확실한 것이란 있을리 없다.

 

그런 완벽한 신을 믿는 신자(信者)이기에

그의 신앙생활 역시 그의 신을 따라 

불안정과 불확실이 없어야 하건만,

실제로 신자의 삶이란 대개

불안과 불안정, 불확실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이 신의 뜻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그 분이 허락하신 삶의 여정은 여전히 확신하기 어렵다.

그 분의 음성은 갈구하나 잘 들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이런 불확실한 현실에서

확신을 찾고자 애쓰는 신자의 발버둥은

불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한다.

그런 신자의 절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안타깝지만, 신자의 삶은

대체로 이와 같은 줄타기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신자도 확신한 것에 거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불안을 잡아줄 분명한 증거를 갈구한다.

신의 뜻이 눈에 선명히 드러나길 희망한다. 

신의 음성을 귀로 쉽게 들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예가 많다.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너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습'을 소에 새겨 섬겼다. (출 32: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보다

보이는 하나님을 스스로 창조하고 믿으려 했다.

 

남유다의 왕 아사는 젊은 시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하여 전쟁이 나섰다. (대하 14:11)

그러나 그의 치세가 안정될수록 그는 사람을 의지했다.

그는 아람왕 벤하닷에게 여호와의 전에 있는 기물을 보냈다. (대하 16:2)

 

 

*Photo : ⓒ심광섭 페이스북 ▲푸생(Nicolas Poussin), 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 c.1634

 

 

'자기'의 소유가 늘어날수록,

'스스로' 지키고 싶은 것이 많아질수록,

더 쉽고 정확한 길을 찾고 싶어한다.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부족할 때 하나님을 통해 얻은 은혜를,

풍부할 때 사람에게 바치곤 한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길이고,

임시적인 눈속임인 것을 알지라도 

그것이 주는 '안정'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

분명함에 거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신의 뜻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는 눈에 선명히 드러날수록, 

귀에 수이 들릴수록, 

신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삶이 그러하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신앙인의 삶이란

불확실의 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불안정한 시간을 오롯이 수용해야 한다.

 

불확실을 확실로 풀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신앙인의 삶이다.

확실함을 손에 움켜잡는 것이 아니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길 원하신다.

대화하길 원하신다.

토론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확실이란 결과 보다

확실로 가는 과정 속에서 

그 분과 만나는 시간 자체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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