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도래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feat.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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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 소식지 : 편지/에세이 & 칼럼 & 리뷰

[생각+] 도래할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feat. 조국)

by 독/한/아빠 2019.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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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조국 전 정무수석(서울대 교수)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이번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조국이었기에

처음 지명되었을 때부터

임명까지 험로가 예상 됐었다.

하지만, 실제론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의혹과 잡음이 증폭되며

사회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이미지 출처: KBS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273986)

 

조국(실제론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들은

아직도 여전히 의혹일 뿐

사실관계가 규명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들은 의혹의 '실체' 뿐 아니라

의혹의 '여지'마저 인정할 수 없었나 보다.
(일테면 '서민'교수가 칼럼에서 비판한 내용처럼.)  

 

정치권과 언론을 관통하여

마침내 대중에게 전달된 '의혹'들은

거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되어

사회 각 층과 각 세대에 판판이 박혀버렸다.

 

그리고 적폐정권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던

'시민들의 분노'는 화살이 되어

바로 어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놓은 

자신의 '혁명정부'를 향해 날아갔다.

 

물론, 여기에는 언론의 '프레임'과

의혹제기 식의 잘못된 보도형태도

한 몫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어쨌든, 특히 젊은 이들의 분노가 거셌다. 

도대체 무엇이 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거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하고,

분노하게 만든 것일까?

 

일전에 「90년 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에서

청소년 프로그램 분과의 팀장으로 일할 때였다.

나와 그리 나이가 차이나지 않는

조금 어린 후배들이었는데도

함께 일을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간극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행동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고,

아마 그 친구들 역시 내 판단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매 순간 매 사안마다 서로 인내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가졌지만,

매번 해결되지 않던 조각들은 존재했다.

 

지금, 그리고 바로 내일의 사회, 문화 영역에서 주류가 되고 있는 90년 생에 대한 특징을 정리한 서적「90년 생이 온다」 (임홍택 저) 

 

그 무렵 이 책을 발견했다.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있진 않았지만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전에 CFS의 디렉터였던 Dick Angelo 씨가

캠프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컨퍼런스 발표에서 밀레니엄 세대'에 대한

연구결과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흥미로운 주제였으나

그것이 왜 중요한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후배들과 일을 하면 할수록,

또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한 세대의 특징과 그들이 만들어 가는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느끼게 된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90년 생의 젊은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감'에 대한 것이었다.

 

90년 생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거의 '완벽한' 상태의 '정의'를 '기대'하며,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평등, 부도덕에 대한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하고,

이를 발견하면 반드시 해결하고 한다.

때문에 그들을 단편적으로 볼 때는

이기적이거나 무례해 보이지만,

사회라는 큰 틀 안에서 볼 때는

다른 어떤 시대의 주체들보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세대이다.

 

 

나는 이 분석에 상당히 동의한다.

이 관점에서 그동안,

그리고 작금의 여러 상황들이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당부분 이해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면에서

뭔가 걸리는 불편함이나

의문이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국의 사태를 통해 좀 더 분명해졌다.

 

 

 


 

"용암처럼 일렁거리던 촛불 바다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다.

 

쉼터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우리 편이 저렇게 많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촛불 시민들의 함성에 실려 왔다."

 

(노무현, 「운명이다」 중에서 발췌)

 


 

위 글은 노무현 대통령의 기록을 모아

유시민시 등이 사후에 출판한

자서전 「운명이다」 의 내용 중 일부이다.

촛불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표현한

'정의감'에 대해 두려움과 부담감을 가진

노무현 대통령의 솔직한 심경이 묻어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에 대한 기준은 매우 높고,

그 욕구는 매우 분명하며

이를 표현하는 것은 적극적이다.

때문에 그들이 믿었던 '정의'로운 대상이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시

그 배신감은 오히려 거대한 노도가 되어

그들의 이전 우상을 삼킨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분명하게 알고

느끼고 계셨던 것 같다. 

 

다시 조국 사태로 돌아가보자.

젊은 계층은 왜 이렇게

조국에 분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고 지지했던
(*사실 관계의 유무를 떠나,

그렇게 오해될 소지를 가진 것만으로도) 

대상에게서 배신당한 상처가

외부로 표출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의 분노는 노도와 같다.

그들의 분노는 화염과 같다.

때문에 사소한 사실관계의 증명은 

이를 진정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몇가지 사실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던

이재정 교육감과 변상욱 앵커는

'사회계급, 차별, 청년분노'라는

프레임에 갖혀 대중의 심판을 받았고,

도리어 조국과 함께 수렁으로 빠져버렸다. 

 

 

다음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현한

유시민의 인터뷰를 발췌한 것(45:00~46:10)이다.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 해도 실수해요.

실수할 수 있어요.

또 실수하게 되요, 사람은.

근데, 그 때마다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린다면

누구도 옳게 살겠다는

그런 의지를 불태우기가 어려워져요.

저는 이게 제일 무섭거든요, 지금.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오류에 빠지기도 하고,

주변사람의 오류에 얽히기도 해요.

 

근데, (그 대상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내가 생각한건데

내 생각과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혹은 아니라는 짐작으로 

죽으라고 하는거잖아요.

 

우리가 옳지 않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다고 해서

누구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이 인간 세상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것 때문에 저는 기본적으로 무서웠어요."

 


 

유시민의 이 말을 들으며

그동아 내 안에서 무엇이 그렇게

불편하고 의심스러웠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날 젊은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공의'는 아니다.

 

물론 오늘 한국교회 역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진 않다.

부족함이 많다.

 

아니, 솔직히 표면적으로만 따지자면

대다수의 비기독교 젊은이들이

말하는 정의가 기독교의 정의보다

하나님의 공의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 이 '정의'로운 세대의

눈높이에서 볼 때

'기성의 교회' 만큼

수준에 미달한 존재가

또 어디있겠는가?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들은 

교회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야 비로소 조금은 그 실체가 드러난

나의 고민은 바로 이것이다.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는

'부도덕한' 기독교인들은

만들 수 없었던 사회적 정의를

 

우리보다 '정의로운' 비기독교인들이

만들어 가려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나는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시대는 점차 악해질 것이라 그동안 믿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올 수록

세상은 점차 더 혼란스러워지고

악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내가 그동안 갖고 있던 상식이었다.

 

그것은 염세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또한 각 개인들은

이를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나는 개인이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전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을 믿는다.

 

다만, 아주 큰 틀에서 볼 때에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말세'를 향한 방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즉, 개인의 선을 위한 노력은

국소적이고, 한시적인 상황 안에선

긍정적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큰 방향성까지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다는 믿음이었다.

 

 Sodom and Gomorrah (by. John Martin, 1852) / *출처: 위키피디아

 

나의 믿음과 생각이 옳다면,

아주 중요한 논리적 결함이 생긴다.

 

'젊은세대가 주장하는 정의는 분명히 옳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공의와도

비슷한 모양인데,

왜 그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말세로 나아가게 되는가?

 

그것은 저들이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인가?

기독교가 아닌 이들이 지향하는 정의는

그 내용으로 하나님께 판단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가?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에서

분명히 벗어난 것 같은데,

도리어 비기독교인의 정의보다 저급한데,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말하는 부도덕한 주장은

오히려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정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란 말인가?'

 


 

아직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진 않지만,

유시민의 이야기는

나의 의문에 한가닥 실마리를 주었다.

 

'정의로운 세대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세계는

왜 말세의 방향성을

거스를 수 없는가?'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추구하는

'완벽한 정의'는

실상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무오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오점을 제거하는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즉, '피흘림의 정의'가 나타난다.

일테면 프랑스 혁명과 단두대와 같이 말이다.

 

온 땅에 만연한 '정의감'이

왜 세상을 정의롭게 바꿀 수 없는가?

그것은 애시당초 현실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느꼈던 불안감은

곧 내가 그동안 수차례 되내었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답이었다.

 

그 누구도 완벽을 지향하지 않게 되며,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저울질 하며,

사회적 정의의 무오함을 달성하기 위해

인격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상대에 죽음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는 미래.

이는 곧 '말세'가 아닌가?

 


 

그렇다.

정의로운 세대도

결국 세상을 정의롭게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나의 고민은 하나다.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 땅에서 실현해 나가야 하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나의 사명이요,

나의 삶의 방향이 될 것이겠다.

물론 나의 이러한 삶 역시

큰 방향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그것은 언제나 그랬다.

아브라함도,

롯도,

이스라엘도,

요셉도,

노아도,

요나도,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에서 구원은 보았을 지는 모르겠지만

큰 틀의 방향을 고칠 수 없었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민하며 나아갔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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