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교육칼럼] 교육, 놀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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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교육칼럼] 교육, 놀이, 문화

by 독/한/아빠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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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9일의 기록. 
- 김인회 교수님의 간사교육 내용을 정리한 글 -

 


연구소가 귀하게 모시고 있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기금 이사장

김인회 교수님을 뵙고 왔다.
점심 식사를 포함한 2시간여 동안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실상은 계속 들었다.)
교수님은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후배 교육자들에게 던져주셨다.
당시 메모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자세한 내용이나

맥락 상의 결핍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워낙 귀한 시간이 이었기에

불완전한 기록이라도 남겨두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야기를 마치며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다짐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놀이-예술-문화'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앞으로 간사로서 방향성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문화(文化, culture)」일 수밖에 없다.
즉, 삶과 관련된 어떠한 환경, 그 자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러한 문화는

곧 놀이와 예술과

같은 맥락에서 연결된다고 생각되었다.

아니, 심지어 세 가지 주제는

같은 뜻일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간사로서, 교육자로서,

향후 공고하게 다져야 할

방향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런 주제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개인적으로 지속하면서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

이 시대의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고, 교류하고,

결국엔 동지(同志)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시대의 필요에 대한

깊은 고민을

지속해야겠다 싶었다.

 

또한
그 일을 책임감 있게 감당하고,

다른 외부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나의 인생철학을 공고하게 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싶었다.

 
김인회 교수님 역시

젊은 시절 뜨거운 혈기로

'교육의 개혁'을 외치셨다고 했다.

그것이 비록 당시에는 실패했을지라도

그 노력이

그 과정이

지금의 김인회 교수님을 만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시민의 삶을 동경한다.

그리고

겸손하고 자족하는 삶을

깊이 존중한다.

 

나는 스스로

거대한 어떤 소명을 맡은 사람이라고

절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혹시 내게 맡겨진 어떠한 소명이

분명하게 보인다면

그 또한 이제는

인정해야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 무엇이라 이야기 하긴 어렵지만,

교수님과의 만남은

내 속에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을

자극했음을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김인회 교수님과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직원들.

 

 

이후부터는 김인회 교수님 강의를 기억에 의존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실제 강의내용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1.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최첨단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언어를 두고 나온 말로 기억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훑어보면

스스로 자처한 문화 사대주의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 일제 식민지의 왜곡된 교육이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왔다.

하지만, 그 역사를 돌아보면

500여 년이 넘는 교육의 쓴 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다만, 여러 시대의 변화와

나라의 흥망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언어가 지속되어 온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며,

동시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왜 다행스러운 일인고하면

언어 형식은 인간의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은

'우랄·알타이 어족 [Ural-Altaic languages, -語族]'에 속한다.

이 어족에는 터키어와 몽골어가 있다.

한자어와 영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리 언어는 술어가 중심이 된다.
예를 들어 영어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으면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 언어는 술어가 중심이기에

주어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술어로만 대화가 가능하다.


술어가 중심이 된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는 본능적이고 행동적인 것에

기초하는 원시 언어의 형태라는 말이다.

 

이 언어의 형태는 부지중에

우리 민족에게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때문에 김인회 교수님은
현시대의 왜곡된 문화나

교육적 모순으로 인한

사회 전반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민족에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언어 사용이라고 하셨다.

 

즉,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잠재적인 힘의 원동력은

바로 이 무의식에서 나온다.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원시적이지만,

원초적인,

내재된 힘을 끌어낼 수 있는

문화적 동기,

그 원형을

찾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2.

성(聖)스러운 행위였던, '놀이'


놀이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우리나라의 언어적 특성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의 놀이 역시

본능에 충실하고 생존적이다.


사실 놀이는 고대의 제사에

그 원형이 있다.

놀이는 사실

신(神)을 모시는 행위였다.
우리나라의 전통 굿은

신을 '놀리기 위한 행위'였다.
우리 옛 선조들은

신들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놀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놀이는 제의 형태이자

성스러운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엔 놀이를 천박하게 여기는데,

역사적으로 놀이를 따져보면

전혀 반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놀이'는

다분히 원시적이어야 하며,

그런 원시적인 놀이는

첨단을 달리는 오늘날에

오히려 중요하고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볼 수 있다.

 


#3.

오늘날 놀이는 왜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놀이'는

왜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대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로 따질 때,

정반대 선상에 놀이가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현대의 교육은

국가가 중심이 되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중심축으로 작동했다.

 

현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시했던 4가지 축은

'관료 / 군대 / 기업 / 학교'라고 김인회 교수님은 설명했다. 

 

이미지 출처: https://brunch.co.kr/@finance1026/201


이른바 '현대 교육'의 목표는

개인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각 개인이 다양성의 정점에

다다르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도리어 
국가라는 거대 조직을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다양한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셨기 때문에

교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고,

비약적인 관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은 생각을 않고서도

일면 동의가 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여하간 이런 점에서 볼 때

(국가의 운영, 유지를 위한 관점에서 볼 때)

'놀이'는 그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제이고,
표준화된 인간상의 완성에

방해가 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때문에 놀이는 저속한 것으로

취급되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늘날처럼 창조성과

개성이 강조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놀이'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현대의 표준화된 인간상을 위한 

도구로서 교육이 지속된다면

조직운영을 위한 부족만 개발될 뿐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교수님의 생각이셨다.

 


#4.

삶의 현장과 함께 하는 교육의 필요 
- 놀이의 역할 및 인간 성품 교육 -

 

현대 국가를 지탱하는 4가지 중심축은

'관료, 군대, 기업, 학교'이다.
이 중 사회나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익과 밀접한 기업이 첫째고,

생명과 관련된 군대가 둘째이다.
관료조직이나 교육은

다른 두 주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 변화와 흐름에

둔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육의 영역은

왜 시대의 변화와 둔감할 수밖에 없는가?

바로 교육적 가치를

실생활에서 완성하기 위한

'현장(field)이 부재(不在)'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때문에 상인 문화를 천박하게 여겼고,
책상에서 경전을 외우는

지식중심의 교육을 최고로 여겼다.


그러나 실은 상인 문화

(혹은 오늘날 '기술 교육' 분야)야 말로

실생활에 가장 밀접한 분야이다.

상인들은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을 대해야 하며

그들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요즘도 '이공계 기피현상'의 이야기가 잦다.

그러나 실은 과학기술이나

상공업이야 말로

국가를 유지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다.

 

이런 유형의 기술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싱글족, 독 자녀(獨子女), 사이버 문화 등

여러 사회적 이슈로 인해

대인관계 기술이나

개인, 사회적 기술 등의 부재도 심각하다.

생존을 위한 무형의 기술 또한

오늘날 대두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교육은 학교와 책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그런 고정관념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었다.

 

상업이나 실생활을 바탕으로 한

교육은 여러 의미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의 교육이야 말로

시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현장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5.
무(無)와 감통(感通)


마지막 주제는 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주희(주자)의 '주역'에 관한 것이었다.

 

주역은 우주와 사회의 이치를 다룬 책이다.

주역을 보면 '감통'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감통이란 '느끼는 것으로 소통한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인간 또한 동물이나

여타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이를 연장하여

'놀이' 역시 이런 감통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신다 하셨다.

'없음(無)' 또한 주역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런 '무'는 여러 존재적 정의 속에

감통의 영역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진 않는다.

어려운 주제인 듯하다.

과연 '존재의 없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존재하는 여러 영역들은 무엇인가?)

 


 

 

2019년 9월 11일.

아주 오래된 노트의 먼지를 털어

다시 기록으로 남긴다.

 

여전히 나에게 의미를 주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다.

감사한 일이다.

 

불과 얼마 전의 일 같은데,

거의 2년 반이 넘었다.

 

나의 짧은,

아직은 끝나지 않은

삶 속에서

 

어제와

오늘의

이 기록들은

 

나의 내일에

어떻게 기록되고

완성되어갈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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