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서
포털이나 유튜브를 하다 보면
개인의 관심사나
검색기록을 수집하여
자동으로 링크 목록이 생긴다.
이제 곧 다가오는 총선 때문에
몇 번 정치 관련 기사를 검색했더니
'정치합시다'라는
프로그램 예고편이 링크되었다.
많은 시간이 있지는 않아
전체 영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티저 영상을 보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글을 남긴다.
사족蛇足이긴 하지만,
이 생각도 남기려고 싶다.
인터넷을 켜는 순간,
말 그대로 시간은 유수와 같이 지나간다.
혼이 쏙 빠지게 그곳에 흠뻑 빠져든다.
앞선 말한 대로
개인의 취향을 분석하여
포털, 유튜브 등 모든 인터넷마다
연관 정보들을 노출시켜주니
한 번 클릭을 하는 순간,
늪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인터넷을 켤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어지간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곳에 발을 딛었던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때로는, 아니 자주
의미 없이 시간을
물 위에 띄워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주의, 또 주의 하자.
내가 본 영상은 아래의 영상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확인해보길.
원체 짧은 영상이기에 내용이랄 것은 없다.
그중에서 내게 꽂힌 것은 유시민의 말이었다.

그의 저 말은
이따금, 자주, 혼자서
자문自問하고 있었던
한 가지 주제를 환기했다.
그 주제는
(별 것도 없으면서, 짐짓 거창하게 말하자면,)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많이 알고 싶다.
더 많이 이 세상 자체에 대해 알고 싶다.
이 세상이 운영되는 원칙에 대하여
좀 더 종교적으로 바라보면
'진리'에 대하여 더 많이 깨닫고 싶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그 끝은 매번 거의 똑같다.
"알아서 뭐하게?"
그래.
아는 것이 무에 힘이겠는가?
더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는 무에 힘이겠는가?
속으로 아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한 번 가정해보자.
내가 어떤 사실, 진리에 대해
온전하게 깨달았다.
내가 알게 된 그 진실은
심지어 앞으로도 절대 불변할
궁극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속에만 머문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앎이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앎이 그 궁극적인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결국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법이다.
실천되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범인凡人이라,
평범한 생각과
평범한 고민밖에 하질 못한다.
때문에 나의 사색과 고민들은
일찍이 누군가가 했던
낡은 것뿐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그래서 감사하다.
그들의 오랜 고뇌에
나 역시 동참할 수 있어서.
일찍이 중국의 사상가
양명 왕수인 선생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를 뜻하는
'지행합일'을 강조했다.
知是行之始(직시행지시)
行是知之成(행시지지성)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작이요,
행하는 것은 아는 것의 완성이라.
어디 왕양명뿐이랴?
유학의 시초라 불리는 공구孔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君子欲訥於言(군자욕눌어언)
而敏於行(이민어행)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실천에는 민첩해야 한다.
그렇다.
앎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행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은 결코 떨어져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앎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비정상적인 곳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조금 달리 말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도
비정상적인 환경을 만나면
그 원형은 왜곡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그렇다.
내가 찾은 순수한 진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진리도
왜곡된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불완전한 세상에 적용되는 순간,
똑같이 오염되고,
불완不完해지고,
퇴색될 수 있다.
그런데,
그래도,
그것이
고고히,
홀로
순수한 것보다
도리어 의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손상된 진실이
더 온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하늘에 계시지 않으셨다.
손상되고, 상처 많은,
왜곡된 이 땅으로
직접 내려오셨다.
그분은 이 땅으로 오실 때,
신적 영광을 취하면서
절대적이고 강력한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도 아니었다.
불완하고, 약하고,
능력의 제한이 많은
인간의 모습,
그것도 무시받고, 천한,
아니
보통의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의 일생을 통한
구원 사역, 그 성취도 마찬가지다.
신적 영광과 왕의 권위로
위엄을 갖추어 이루시지 않으셨다.
도리어 욕과 저주를 받고,
침 뱉음을 감내하는,
사형수가 되셔서 이루셨다.
세상을 온전하게 하시는
그분의 사역은
일반적인 생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셨다.
불완함을 통하여 온전함을 이루신 것이다.
어디 '불완'한 것이 그뿐이랴.
그런 십자가는 또 어찌 지셨는가?
그분의 자신이 가진
신적 능력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수용하셨다.
심지어는 그래서 스스로 끝까지
당신의 십자가를 지실 수도 없었다.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그 십자가를
골고다에 세울 수 있었다.

비록 생각에는,
이성理性에는, 이상理想에는
지금 이 땅에 적용되고 있는
나의 깨달음이
그 진실이, 존재가
불완전해 보일 수 있다.
괜찮다.
이미 앎은
그 불완함을 통해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앎은 겉으로 드러날 때에만 의미 있다.
그리스도께서
불완전함을 통하여
완전함을 이루셨던 것처럼 말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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