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세상에 '객관적'이란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순수하게 객관적인
사실이란 것이 있을까?
'내' 생각에(!)
누구나
자신만의
가치가 있고,
관점이 있고,
의견이 있다.
그런 자신만의
가치와 관점을 가지고
어떤 '사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한 개인이
'인식하는' 세상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만약 어떤 이가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진심을 다해
노력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그 또한
그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과 태도가 투영된
주관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객관적이다',
'주관적이다'
말하는 것은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내 속에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느냐
아니면
내 밖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느냐
따위의 질문인 것이다.
객관적이 되기 위해
타인의 의견과 관점을
더 많이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
여러 관점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자신의 태도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2. 고통에 대하여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
이겨낼 수 있어.'
그러나
이 주관적인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범주를
내 고통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까지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도
혹은
비교할 필요도 없는
절대적인
고통을 경험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과 이유로
어떤 이가
생명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시 누군가는
'왜 그깟 이유로 목숨을 버려?'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개인의 관점이니.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 사람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 속에
살았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가 아니며,
나는 그가 인식했던
절대적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지극히 상대적이며,
동시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3. 행복하고 싶다면?
만약
세상을
따뜻하게,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다면,
일테면
아기들처럼
단순해진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혹자는
그것을 두고
'아직 세상을 덜 살아서 그래.'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라고 폄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더 잘 알고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더 많이 경험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앎이, 그런 경험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아기들이
어른들보다
더 행복한 이유는
아기들이
보고, 인식할 수 있는
그들의 지식이,
관점이,
가치가,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객관적인 것은 없다.
한 사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 따위의
주관적인
결정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부조리하더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지식이 없다면,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래서
오로지
밝은 점 밖에,
긍정적인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행운인 것이다.
그가 인식하는
실체가
표면적이든
단면이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
세상이란
결국
한 개인이 인식하는
주관적인
존재일 뿐이니!
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낄 뿐이고,
내가
지금 이 순간
볼 수 있는 것을
볼뿐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어떤 의미에선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4. 누구나 자기 모습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에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없다면,
그러한 관점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건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내 모습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게 내 십자가인 것을!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다.
더 무거운 십자가란 없고,
때문에
더 가벼운 십자가도 없다.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다.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찌르는
가시가 있는 것이다.
인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까지,
그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면 족한 것이다.
그 무게야 무에 중요할까?
나에게
긍정적인 태도가 없다면,
그러한 관점이 없다면...
그렇게 살아야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의 잘못이 아니다.
때문에
자신을 너무 채근할 필요도,
너무 정죄할 필요도 없다.
변화를 위해 노력하되,
변화하지 않는 자신에 대하여
너무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누.
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찌하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공동번역/행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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