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삶, 죽음 #03: '죽음'은 죄에 대한 '징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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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삶, 죽음 #03: '죽음'은 죄에 대한 '징벌'인가?

by 독/한/아빠 2021.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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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죽는다.

 

나이가 지극히 들어 노년에 죽는 사람도 있고,

인생의 꽃도 채 못 피워보고 일찍 떠나는 사람도 있다.

 

침상에 누워 고요히 떠난 사람도 있고,

사고처럼 끔찍한 죽음을 맡게 되는 이도 있다.

 


 

죽음의 이면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해되지 않는 질문을 쓴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 땅의 삶 뿐이다.

때문에 죽음은 '불확실'이 주는 '두려움'의 색이 짙다.

 

우리가 아는 것이 이 땅의 삶 뿐이기에 또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은 '불행'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미지 출처: Boxen Lockerer Ko - Kostenloses Foto auf Pixabay

 

 

 

특별히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불행한 사회구조가 '합리'로 인식되는 오늘,

'죽음'은 종종 '실패(자)'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인 것이다.

물론 그도 죽을 것이나,

그것은 '지금, 현재'의 시점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더' 오래 살았기에

'더' 강한사람이 되고,

'더' 성공한 사람,

혹은 '더' 선한 사람이 된다.

 

 

Wirbel Tier Natur - Kostenloses Foto auf Pixabay

 

 

이 쯤만해도 죽음이란 충분히 침울한 것인데,

여기에 또 더하여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죄에 대한 보상, 징벌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물론 성경에선 죄의 삯은 죽음(롬6:23)이라 했지만,

죽음에 담긴 의미는 과연 그 뿐인가?

과연 징벌적 의미만 존재하는 것인가?

 

솔직히 개인적으로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질문이 많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생의 죽음(의 모습)은 

현생에 대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저생에서 받을 평가에도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 믿음이다.

내가 이렇게 믿게 만든 성경의 예화를 말하고 싶다.

 

주인공은 여로보암의 아들이었다. (왕상 14:5~13)

안타깝지만 그는 아버지의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그가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어렸지 않을까?

그가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요절했다. 일찍 죽었다.

병 들어 죽었다. 불행한 죽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 죄에 대한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다윗의 대적인 사울은 전쟁에서 죽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의 죽음을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말한다.

옳다. 그는 하나님이 직접 그의 대적이 되셨다고 성경이 말한다. 

 

반면, 다윗은 전쟁 속에서 하나님이 지키셨고, 

아들에게 평온하게 왕위를 물려준 뒤 침상에서 죽었으니,

 

이 두 죽음을 비교해보자면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은 어쩌면

죄로 인한 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 전쟁에서 사울만 죽었는가?

사울의 목만 비참하게 효수되었는가?

 

다윗과 서로 사랑한,

진정한 우정의 표본으로 여겨지던,

하나님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용사 요나단은 어디에서 죽었는가?

 

 


 

 

극단적인 예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을 제하면) 비참한 죽음이었다.

 

당시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 했다.

순전하신 예수께서는 저주를 받은 자처럼 나무에 달리셨다.

 

당시 그 시점의 예수의 죽음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실패자'라 비웃었다.

죄에 대한 보응을 받은 것이라 말했다.

 

대중의 그 판단은 제자들조차 두렵게 했다.

그들은 패배감과 절망감,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도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죽음이 실은

승리의 죽음이란 사실을... 

 

나는 기독교인들이 왜 이렇게 

죽음에 '당당'한지 모르겠다.

어찌 그리 강한 '확신'속에 거하는 지 모르겠다.

 

누가 죽음을 보았는가?

누가 그리 확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겸손하게 오늘을 살고,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기독교인들이 그만 죽음에 대해 확신했으면 좋겠다.

 

 

Ostern-Kreuz 3 Kreuze Auf Dem - Kostenloses Bild auf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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