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연장선에서 살고 있겠지.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어차피 한 번 살다가 죽는 것.
내가 이 땅에 온 이유를 제대로 알고, 그대로 살다가 죽었으면 했었다.
지금 돌아 보더라도 뭐, 어린 마음에, 나름 순진한 혹은 순수한 바람을
그런 식으로 가졌던 것은 나쁘지 않았다.
나름 귀여운 맛이 있는, 누군가가 귀하게 여겨 줄 그런 류의 태도 쯤?
그런데, 그런 내 태도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흔들림과 같은 의미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실천적인 부분,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이 항상 내게 문제가 되었다.
정작, 나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목소리인지,
어쩌면 그것들은 단순한 내 바람인지,
스스로 구분하고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실상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2년 전, 독일에 왔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실제로도 그와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다.
"기도를 하다보니...
그런 마음이 생겼는데...
이 상황을 분별하고자 노력했고...
기적같은 우연들이 생겨서...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
그것에 순종하기로 해서..."
그런데,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내가 한국에 남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었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하나님은 나에게 독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한국에 남아있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말이 내 독일행을 후회하고, 그 선택을 부인하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지난 2년의 독일 생활, 혹은 그 전 독일행을 선택했던 과정을 돌아볼때,
그 과정 속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은혜와 도움으로 말미암아 진행되었음을 여전히 고백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독일행'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하나님은 아마 그렇게 일하셨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셨을 것이고,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그 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8)"
그래 어쩌면, 그 분께는 나의 그런 선택이 아무 의미도 없었을지 모른다.
내 선택은 그분의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상관없다는 것은 "무심"한 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 분은 내 모든 선택에 "상관"없지만,
동시에 "관심"있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분은 내게 이렇게 내게 이야기 하셨을 것이다.
"네가 어떤 길로 가든, 그곳엔 나도 간다.
그러니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나는 상관 없다.
네가 나를 기억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네가 함께 가자고 한다면, 나는 너와 같이 가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청년이여... 네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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