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투어 말고, 휴양 한 번 해볼라고...
크로아티아 풀라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우스개 소리로 독일 사람들 꿈은 "은퇴(Rente)"라는 말이 있다. 비교적 잘 갖추어진 사회보장 정책으로 어느 정도 노후가 보장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 매월 일정 금액의 돈을 받고 쉬고 싶고, 즐기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독일 사람들이 일을 하는 동기는 또한 농 반, 진 반으로 길고 긴 휴가를 보내는 것에 있는 듯싶다. 독일은 주 40시간 정규직의 경우 보통 30일 이상의 유급휴가를 보장받는다.
그래서일까? 여름이 오면 독일의 공기가 사뭇 달라진다. 사람들 표정에도 해방감 같은 것이 번지고, 이맘때면 슬며시 도시가 텅 비기 시작한다. 길게는 한 달, 짧아도 2주는 족히 떠나는 이들이 많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더하다. 모처럼의 긴 방학 시즌을 맞춰서, 못해도 서너 시간 운전하여 국경을 넘는 '간단한(?) 해외여행'이라도 기획하곤 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 우리 아이들의 친구 집들만 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독일에 온 뒤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네는 매년 크로아티아 섬으로 보트를 타러 간다. 여름이 오면 1년 내 차고에서 기다리고 있는 개인보트를 차 뒤에 달고 크로아티아로 12시간을 내달린다. 아들의 친한 친구 가족은 매년 그리스 크레타 섬에 있는 단골 호텔로 간다. 연례행사와 같아서 1년 전부터 예약해 두고 이 날을 기다린다. 헤센과 바이에른의 여름방학 기간이 달라 시간만 잘 맞추면 뮌헨에서 크레타까지 싼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다는 팁도 매년 되풀이해서 설명해 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여름마다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한 달을 보낸다. 덴마크의 바닷가 캠핑장을 사랑하는 가족도 있다.
그렇게 독일의 여름은 한 해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에게 가장 이상적인 여름휴가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나의 고향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에 온 지 6년이 되었는데 매년 독일 사회에 더 적응을 하는 듯 하지만 마음속에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지곤 한다. 그러나 모든 삶의 이치가 그렇듯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있기 마련다. 벌써 3년이 되었는데, 당시 한국여행에서 우리 다섯 식구가 쓴 비행기값만 해도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부가적인 비용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지간히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것이 고향행이다. 이역만리 타지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아내가 사회복지사 자격 과정(Anerkennungsjahr)을 마무리하는 해이다. 아내는 한국에서 획득한 사회복지사 자격을 독일에서 상호 인증받기 위해 독일 대학교를 다녔고, 지난 1년간 시청 청소년과 에서 실무훈련과정(Praktikum)을 받고 있다. 이 1년간의 실무과정 이후 관련 내용에 대한 논문(Reflexionsarbeit)을 쓰고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독일 사회복지사가 될 수 있다. 그 지난한 과정이 이제 10월이 되면 끝난다. 많이 해냈지만 마지막은 늘 어려운 법이다. 아내에게 이 시기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 틀림없었다.

아내를 늘 응원하지만 그 사이 나도 많이 지쳐있었다. 나 역시 작년엔 석사 과정을 마치고, 기존의 직장에서 역할을 추가하여 교육자(Erzieher)로 일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독일 사회에서 버티는 그 시간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럭셔리 한, 아니 럭셔리까진 아니라도 긴 고향으로의 여름휴가라는 말은 지금으로선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래서 더욱 휴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했다. 꼭 멀리 가지 않아도, 긴 비행이 아니어도, 우리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 절실했다. 어쩌면 매일이 그러하겠지만, 오늘 역시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조건을 따져 고른 곳이 바로 크로아티아의 풀라(Pula)였다. 독일 내륙도 아름답지만, 바닷가가 그리웠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지중해 특유의 밝고 투명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곳, 동시에 비교적 부담스럽지 않은 비용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 여러 지역을 살펴보다가 이스트라 반도 끝자락의 풀라라는 도시를 알게 되었다.
여행 전에는 사실 별다른 정보 없이 떠났다. 그저 열흘간, 그늘 아래서 책을 읽거나, 바닷물에 몸을 담그거나, 아이들과 스노클을 하며 보내면 좋겠다는 단순한 기대뿐이었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풀라가 생각보다 훨씬 역사적인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이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고, 구시가지의 골목마다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물론 이번 여행의 핵심은 그런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시간. 일정표 없는 여행, 계획 없는 하루. 대체로는 아이들과 바닷가를 거닐거나, 간단한 요리를 해 먹고, 오후에는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이면 여유롭게 동네를 산책하거나, 근처 해산물 시장을 들렀다.
독일 마부르크에서 풀라까지는 자동차로 12시간, 1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 모든 길의 피로가 도착하자마자 스르르 풀렸다. 오랜만에 맞는 느긋한 바닷바람 속에서, 이방인의 삶에서 짧게나마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이 여행을 한 번 기록해보려고 한다. 모처럼 한국 사람들의 바쁜 관광이 아닌 유러피안들의 휴양에 도전했던 시간이었으니. 세세한 준비와 계획 없이 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우리 가족의 첫 여행이 어떠했는지. 이래저래 떠오르는 생각들을 몇 번으로 나누어 끄적여 보려 한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는 아주 사적인 생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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