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에게 친구가 생겼다
내일부터 첫째 딸은 다시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신났다.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 '이크눠(Iknur)'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이맘때 어린이들에게는 '또래'가 중요한 법이다.
우리 막내에게도 죽고 못 사는 좋은 친구가 있다. 그것도 셋이나 있다.
약 3개월 전쯤이었던 것 같다. 아침을 먹으려 주방으로 내려갔는데, 아들 녀석이 어제 친구들과 놀았던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내 친구 제롬마저이랑 어제 놀다가 '쇼콜라데(Schokolade, 초콜릿)'를 먹었는데, 걔가 내 꺼를 뺏어먹었어."
유치원 친구 이야기인가 싶었다. 친구들과 놀다 보면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니 별스럽지는 않았지만, 궁금한 마음에 '그렇게 하는 것 유치원 선생님은 보고 뭐라고 안 하셨어?'라고 물어보았다.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내 친구 제롬마저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꺼 선물을 가지고 와서 줬어."
엥?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이야기 전개에 당황하여 막내와 첫째와 둘째를 번갈아 쳐다보니,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막내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아, 이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구나.'
우리 아들의 친구들은 '스파이(Spei), 제롬마저이(Jeromazeu), 아메리카(Amerika)'.
난 아직 한 번도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아이들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아들의 머릿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아들은 매일마다 그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신이 나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야기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매 순간 진지하다. 비록 나는 볼 수 없지만, 아들은 분명하게 볼 수 있나 보다. 그들은 아들의 머릿속에서는 분명하게, 생생하게 살아 존재하는 친구들이 틀림이 없다.
이것은 첫째와 둘째를 키울 때는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 "비밀친구"는 유아 발달의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혹, 이런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망상(delusion)'이나 '자아분열(Schizophrenie)'같은 심리적 증상을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걱정일랑 살포시 접어두시길. 이 같은 유아에게 나타나는 '비밀친구'는 발달 단계에서 심심찮게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특징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의 주인공 제제(Zezé)의 '밍기뉴'가 그런 친구가 아니었는가?
<안네의 일기>의 안네 프랑크(Anne Marie Frank)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 '키티'. 아마 그도 단지 문학적 수사나 존재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실존'하는 친구였을 것이다.
얼마 전, Hessen 지역 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유아기 아이들에게 존재하는 비밀 친구는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마르부르크 시내 엘리자베스 학교 8학년 친구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연구결과 분석)
기사의 관련 내용을 몇 부분 추려 소개한다.
- Keine Störung, sondern Kreativität
(보이지 않는 친구는 '장애'가 아니라, '창의적' 능력이다.) - Die unsichtbaren Freunde seien vielmehr eine kreative Leistung, die dem Kind in schwierigen Situationen hilft und seine Entwirklung fördert.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에라도, '상상의 친구들'은 정서적으로 도와주어, 오히려 아이들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창의적으로 만든다.) - Insgesamt sollen diese Kinder eher kreativer und weniger schüchtern sein als andere, haben höhere soziale Kompetenzen und ein besseres Sprachgefühl.
(전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친구'를 지닌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창의적이고, 수줍음이 적으며, 사회적 기술이 뛰어나고, 언어적인 능력이 좋다.) - Unsichtbare Freunde fördern Empathie:
('보이지 않는 친구'는 공감능력을 촉진시킨다.) - Kinder mit imaginären freunden können sich besser in ihr Gegenüber hineinversetzen.
('보이지 않는 친구'를 가진 아이들이 또래 친구들과 소통 능력이 좋다.) - Kinder ohne imaginäre Freunden haben ihre realen Freunde eher nach Äußerlichkeiten beschrieben wie zum Beispiel Harre order Hautfarbe, große und andere Merkmale.
Kinder mit imaginäre Freunden hingegen haben ihre Freunde ehre nach Charakterzügen wie Humor, Freundlichkeit und Hilfsbereitschaft beschrieben.
('가상 친구'가 없는 아이들의 경우 머리색, 피부색, 키와 같은 외모로 친구들을 묘사하는 반면,
'가상친구'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는 유머, 친근감, 이타심 같은 개성에 초점을 두고 친구를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 아들의 "상상"의 세상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자녀 셋. 많다면 많고, 적다면... 그래도 적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우리 가정에는 '충분한, 완벽한' 수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여러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좋다.
언젠가 엘론 머스크의 기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 세상은 누군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 삶이란 누군가 상상해놓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거나, 혹은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가는 세상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일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아들이 지금 선명하게 꿈꾸고 '상상'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더 재미있는 세상을 꿈꾸고, 더 멋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아들 녀석도 그런 와중에 스스로 멋있는 사람이 되고, 멋있는 세상을 만들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나는 이미 잃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실은 내 속 깊은 곳에 숨어 '잠자고 있는' 나의 상상력을 깨워 아들의 세상 속에 함께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다.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S.루이스가 자신의 동화 <나니아 연대기>에 쓴 머리말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너는 이미 동화를 읽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이 책을 인쇄해서 제본할 무렵이면 훨씬 더 자라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다시 동화를 읽을 정도로 충분히 나이가 들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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