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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 소식지 : 편지

늘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이유

by 바후르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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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사순절의 즈음에 나는 내가 독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닿아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때가 사순절 이후 어느 즈음이라고 내가 특정하여 알고 있는 까닭은 그 시기 내가 마음을 정하여 특별 묵상을 하며 앞 날의 결정을 위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었다. 매 순간 기도했고, 묵상했고, 찬양했고, 갈구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거의 8년이 가까웠던, 첫 사랑, 연구소를 사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종류의 만류들이 있었다. 달콤한 회유도 있었고, 꾸짖음과 윽박도 있었고, 마땅히 얻을 법한 양해를 얻지 못하는 불이익, 불합리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관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외부의 권유였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전에 함께 일하던 선배가 자신의 기관에서 함께 일을 하자는 권유를 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다. 당시 독일행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남산 아래 있는 독일 문화원을 다니던 중이었는데, 그 기관이 역시 남산 언저리에 있었다. 연구소를 사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완료되기 전, 소위 보이지 않는 믿음의 확신에 의한 갑작스런 결정이었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 많았는데, 만약 이 제안을 따르게 된다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차근차근 독일행을 준비할 수 있게될 것이므로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결국 거절했다. 그만큼 나는 독일행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독일로 가라고 말하신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 결정을 담대히 내린 뒤, 내가 맞아들인 결과물은 처참했다. 한국과 독일의 행정적 차이와 대학접수 과정에 대한 몰이해로, 내가 원하는 대학원에 내 서류가 접수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결정을 독일로 홀로 출국하기 2주도 채 남기지 않은 때에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추가로 서류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만약 기적적으로 서류를 준비하여 당장 발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서류가 정상적으로 접수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의 얄팍한 지식으로 '어렴풋이' 생각했던 독일 유학의 과정을 처음부터 망가뜨린채, 혹은 완전히 망가졌음을 인식한 채로 독일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듯 담대한 고백과 결정의 끝은 혼란과 불안이었다. 그 시간은 매우 쉽지 않은 순간이었고, 어느 점에서는 지금껏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제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현실적인 형통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은 아니며, 또한 그런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나와 내 가정의 길을 인도하셨고, 살 거처와 좋은 이웃, 내가 가야할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여전히 현실적으로는 부족함이 많고, 내가 가야할 길과 꿈은 멀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길이라고 이제는 어느 정도 더 당당히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슷한 상황이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은 대로는 쳇바퀴 같아서 늘 비슷한 결을 따라 도는 것 같다. 마치 LP판의 골이 비슷하여 겉으로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없지만, 그 길을 따라 다른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늘 비슷한 결을 반복해서 따라 도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이렇게 혼란스런 삶에서 발버둥 칠 때, 어느 귀한 단체를 알게 되었다. 귀한 제안이 있었고, 분에 넘치는 역할을 얻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이 보이는 자리였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맡았다. 솔직히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리를 내려 놓고 있진 않다. 자리를 훅 던져 내려놓는 것이 나에게 편한 일이지만, 상대의 귀한 마음이 오히려 시험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저 기도하는 중이다.

 

출처=픽사베이

 

마태복음 5:42 -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가 없다. 이렇게 계속 연결되어 이어질수록 서로 다른 기대가 뒤엉켜 복잡해짐을 알고 있으나, 끊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그 때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감당하겠노라고 말하며 버티는 중이다.

 

그냥 그 분의 제안을 받아버리면 편할수도 있다. 적어도 나를 인정해주고, 더 멋있어 보이는 곳으로 내가 가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이후에 더 좋은 일이 생길수도 있다. 국회의원이나 국가기관의 대표들과 교류하는 일이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 마치 한국을 위해 내가 더 거창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내게 주신 마음이 그러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이에서 다 발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 복잡하게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며, 끊지도 붙잡지도 못하는 영 애매한 상황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는 내 현실이 영 안타깝고 초라하다. 내가 왜 이렇게 현실적으로 매번 손해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뜻이 그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이 그리 별 것, 대단한 것이 없어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결국은 덧없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이런 어리석음의 끝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여전히 그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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