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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 소식지 : 편지/에세이 & 칼럼 & 리뷰

[경험교육칼럼] '이상적인' 교육은 '실제로' 존재할까?

by 바후르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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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새 교육 운동'을 이끌었던 교육 철학가 존 듀이는 기성 교육의 목표를 '어린 세대가 미래 삶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라고 정리했다.

 

내가 본 바로 듀이는 이 목표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진 않았다. 다만, 사회의 변화가 점진적이었던 20세기 초였기에 '미래의 지식'을 가늠하고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그 목적 하에서 부여받은 학생들의 역할은 '순종적'으로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듀이는 피교육자의 역할이 이처럼 극도로 제한된 것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듀이는 그 당시로서도 '배운다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피교육자로서 학생이 가질 수 있는 역할을 확장할 수 없는가?'와 같은 논의를 시작했다. 비록 주류를 이루는 교육의 흐름을 변화시키진 못했지만, 듀이의 질문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여전히 여러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 진보교육운동의 시작이다.

 

20세기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경험 교육 주창자였던 '존 듀이' (1859~1952)

 

 


 

자칫 따분한 전개일 수 있겠지만, 계속 글을 이어나가기 전에 몇 가지 부분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 번째, 나는 존 듀이의 교육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 부분 듀이의 고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진행되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도 이런 듀이의 고민을 연장하여 우리 가족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두 번째로 짚을 부분은 나의 질문을 통해 시작하려고 한다.

 

듀이의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는
'대안교육'에 국한될까?

 

나는 '새 교육 운동'을 이끌었던 당시의 교육자들, 그리고 지금 이 글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류를 형성한 기성 교육의 한계를 자신이 직접 피부로 느꼈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 환경 속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지닌 사람들이라 믿는다. 기성 교육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인식,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 마련과 변화의 촉구는 그들이 지닌 기본적인 품성이다. 극히 자연스러운 일련의 조건으로 인해 오늘날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가 자칫 '대안교육'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잘못된 이해의 산물일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대안교육'이라고 이야기하면, 기성 교육의 제도와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볼까?

 

"나는 내 자녀를 대안교육을 통해 키우고 있습니다."

 

열에 여덟, 아홉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 사람은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구나.' 

'자녀를 홈스쿨을 통해 교육하는구나.' 

'기존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떻게 교육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안교육'이라 하면 기존의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을 통하지 않은 교육, 혹은 주류 교육 밖의 교육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올바른 교육'과 위와 같은 '대안교육'은 분명히 다르다. 이는 질문을 조금 비틀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올바른 교육'은 기존 교육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물론 누군가는 위와 같은 질문에 "그럼요. 기존의 교육 틀 안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 것 아닙니까!"라고 답 할런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전적으로 다르다. '올바른 교육'이란 '방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태도'나 '정신', '지향하는 방향성'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든 바른 교육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방법론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학교와 시험을 모두 부정하든, 아니면 기존의 주류 교육 방법론을 신봉하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에 필요한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런 부분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예를 들어볼까? 

 

"나는 올바른 교육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아, 이 사람은 이상적인 교육을 꿈꾸는구나.'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을까? 

 

결국 이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가치를 밝힌 그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제야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마지막 부분이다.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가 그 자체로 아무런 논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왜 굳이 이런 지루한 사족을 붙여 설명한 것인가? 

 

 

그것은 교육이라는 환경에서 (어쩌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누구에게나 꼭 맞는 '정답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다. '방법론'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공유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은 앞으로 전개한 '나의 철학'과 '나의 방법'도 마찬가지다. 

 

나는 결코 '대안교육의 방법'을 다루고 싶지 않다. 그저 '올바른 교육'을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서 동일하게 '올바른 교육'을 지향하는 다른 사람에게 참고가 될 만한 나의 삶을 나누고 싶은 것뿐이다.

 

 

이상적인 것은 허상에 가깝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또한 어디서든, 어떻게든 시도될 수 있다.

 

 

조금은 과격한 표현이지만, 나는 '올바른 교육'이란 용어 자체는 실제로 허상에 가깝다 생각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이상적'인 것이란 현실에선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가 하나라도 있는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는 다양한 방법을 그대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가치도 절대성을 부여받을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그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이렇듯 개개인이 지닌 '상대성'을 통해 부여받은 '절대성'은 곧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의 틀을 제공해 준다. 

 

'올바른 교육'은 이와 같은 '이상적인 바람'을 담고 있기에, 현실에서 다양한 교육 방법론으로 '시도'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결코 현실에선 '완성'되거나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 너무 허무해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현대 성장 심리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핵심적인 명제가 우리를 위로해주지 않는가?

 

온전한 인간이란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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