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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 소식지 : 편지/에세이 & 칼럼 & 리뷰

[경험교육칼럼]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샬럿 메이슨)

by 바후르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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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흔히 '개성(Character)'이라 부르듯이 누구나 서로 다른 성정과 기질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타인과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 활력이 생기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타인 시간을 보내고 나면 금세 지치는 사람도 있다.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단 사람도 있고,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도 있다.... 세상에  비슷한 사람은 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나를 알고 있을까?

 


 

성격이 모두 다르듯
배우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배우는 방식도 개성과 비슷하다. 저마다 익숙하고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읽고 쓰는 것'이 편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책 통해 다른 사람의 지식을 전달받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할 때 '잘 배웠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은 어렵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로 전달하고, 타인의 생각을 말로 들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학습한다.

꼭 언어를 통해서 배우는 것만도 아니다. 호기심이 넘치는 어떤 사람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 궁금했던 것 주제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기도 한다. 이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해주는 행위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직접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가질 때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 소위 '자신의 몸을 통해 확인하고 익힌 사실(learning by doing)'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가진 기질과 성정. 즉, 개성이 셀 수 없이 다양하다고 한다면, 사실 그 개성에 따른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효과적인 학습방법 역시 무수히 많은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나도 세 명의 자녀가 있다. 우리 집 아이들 봐도 이런 사실은 자명하다. 

 

첫째는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들는 것을 선호한다.
둘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할 때 큰 집중력을 발휘한다.
셋째는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직접 만지고, 먹고, 느끼고.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것 같다.

 

첫째는 만 나이로 6살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글로 읽는 것도 좋아한다. 첫째는 혼자서 있으면 조용히 책을 골라 읽고 있다. 

한편 승부욕, 욕심도 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꼭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것을 보면 자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첫째 아이는 다른 친구가 글을 읽는 것을 보고는 이튿날부터 우리 부부에게 한글 공부책을 사달라 하더니, 금세 혼자서 한글을 익혀버렸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읽는 것'을 통해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첫째를 보면 전형적인 '모범생'같은 느낌이다.

 

반면, 둘째는 소위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자기 세계가 있다는 것은 '외골수'와는 다르다. 자기 세계가 침해되지 않는 영역에선 크게 욕심을 내지도 않고, 이기려 들지도 않기 때문에 되려 다른 사람들과 더 잘 지낸다. 그런 면에서 둘째는 호인이다. 어떤 연령이든, 어떤 성별이든, 어떤 인종이든 관계없이 두루두루 잘 지낸다. 

하지만, '어떤 세계'에 빠져 한 군데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과 완벽히 분리된다.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할 때 특히 그렇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다. 이 경우에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영역이 침해되는 것에 크게 화를 낸다. 소품과 재료가 다양할수록 집중력이 높아지지만, 주변과 자연의 어떤 것이든 둘째에겐 자기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것 같다.

 

둘째는 '관찰'과 '창조'로 배우는 것 같다.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만의 세계에 '폭' 빠져들곤 했다. 

 

셋째는 사내아이라 그럴까, 에너지가 남다르다. 목소리도 행동도 모두 큼직큼직하다. 사고를 치면 보통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나이가 나이인 만큼 '생각보다 몸'이 앞선다. 

놀이를 할 때는 위험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실은 '위험함'이야말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사실 이는 '모험 교육'의 핵심 기제이다. 유명한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 선생의 저서도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가 그 제목 아닌가?

음악도 무척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배운다. 가사에 담긴 내용을 외우기도 하지만, 그 음악이 담고 있는 정서를 느낌에 따라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예술이다. 그 모습은 마치 '달크로즈(Dalcroze)'나 '유리드믹스(Eurythmics)' 수업을 스스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막내는 생각하기 전에 '몸'으로 덤벼들며 배운다. 삼시세끼 하듯 하루 세 번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배움의 열망(?)이 강하다.

 

비슷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동일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이 세 아이도 이처럼 성격과 선호하는 배움의 방식이 다른데, 모든 사람들로 확장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샬럿 메이슨의 실험,
"학생들에 맞는 배움의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영국 출신의 교육자이자, 오늘날 '홈스쿨의 어머니라'라고 인정받는 샬럿 메이슨은 학생으로 하여금 '배움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려 했던 그녀는 또한 개개인에게 맞는 교육방법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샬럿 메이슨은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을 주도해나가는 방법을 실험했는데, 그녀는 이를 통칭하여 '자유롭고 무계획적인 활동(masterly inactivity)'라고 불렀다. 

이 시간에는 교사는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책, 미술재료, 놀잇감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 재료를 준비해놓는다. 혹은 야외 자연환경 그 자체를 교보재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스스로 그 시간을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두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나 선호하는 방식에 따라 그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가 있더라도 교사는 그 아이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샬럿의 이런 방식을 보고 자칫 방임적인 태도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녀의 경우 모든 수업을 이 같이 진행한 것은 아니다. 나름의 교육원칙에 따라 정규적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 같은 비구조화된 교육방식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교육의 주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영국 홈스쿨의 어머니 샬럿 메이슨의 초상

 

이 뿐 아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정규 교육과정에서조차 아이들을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도록 내어놓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은 교사의 이런 일관적인 교육철학 안에서 '스스로',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길러갔다.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배움의 즐거움도 쌓여갔다. 

 

그럼 이쯤에서 한 번 우리의 교육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는 각 사람의 성격과 배움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교육현장에서 인정하고 있는가?

배움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과정인가? 또한 누가 배움을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 

 

[문제] 위의 그림 중 '공부'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 우리의 머릿속에는 너무 정형화된 '학습방식'만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일전에도 말했듯이 현재 교육제도나 기성의 교육 방법론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방법은 선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나의 지극히 '사적인 주장'으로는, 방법의 옳고 그름은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교육적 태도는 교육가(또는 '교육가로서 부모')가 지녀야 하는 '일관적인 태도'라고 나는 믿고 있다. 다만, 이때에도 '바른 교육'이라는 이상을 견주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존 듀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 샬럿 메이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의 교육' 방향을 점검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품 속 가까운 곳에는 항상 확인할 수 있는 그 질문이 필요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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