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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 성경 : 말씀 : 묵상/큐티 : 성경묵상

[묵상] 완벽한 하나님의 불완전한 세상 (ft. 노아의 홍수)

by 바후르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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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신앙, 아니 신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과 불협화음들이 세상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선인의 고통과 악인의 형통 따위의 것들이 이에 대한 예이다. 이는 과거 성경의 몇몇 기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답답함을 토로했을 정도로 신앙인으로써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과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들은 분명 나에게도 있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다는데, 온전하시다는데, 왜 세상은 이리도 불완전한가? 왜 이리 모순 투성이인가?"

개인적으로 이는 내 신앙적 타인에게 공유할 때 꽤 뚜렷한 걸림이 되곤 했는데,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믿는 수밖에 없다'는 식의 해석밖에 뾰족한 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언젠가 토마스 키팅 신부의 문답 동영상을 통해 한가지 생각의 전환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이 악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그 분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겸손하심 때문입니다."

(*아래 링크 참조)

 

[성경말씀 & 성경읽기 & 큐티]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ness)가 되고자 (feat. 토마스 키팅)

2018년 어느 때, 산들바람 공동체 교회 모임에서 토마스 키팅 신부님의 동영상을 함께 시청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 토마스 키팅 신부님 모두 작고하신 해였는데, "영성 신앙의

bahur.tistory.com

 

그리고 오늘, 아침묵상을 통해 본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보며, 그 이야기의 실마리가 조금은 더 풀린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에는 몇 쌍의 동물들이 탑승했을까?

누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열에 아홉은 동물별로 한쌍씩 방주에 태웠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성경을 여러번 읽었고, 창세기도 수 번 읽었음에도 한 번도 이에 대해 의심을 가져본적이 없다.

그러고보면, 싱글스토리(Single Story: 고정관념, vgl. 링크참조 TED 영상)가 참 무섭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하면, 한 쌍의 동물들이 아래 그림과 같이 탑승하는 것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이다.

 

 

출처: 예스24, 온라인서점

 

https://www.ted.com/talks/chimamanda_ngozi_adichie_the_danger_of_a_single_story

 

The danger of a single story

Our lives, our cultures, are composed of many overlapping stories. Novelist Chimamanda Adichie tells the story of how she found her authentic cultural voice -- and warns that if we hear only a single story about another person or country, we risk a critica

www.ted.com

 


 

 

창세기 7장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태울 동물들을 말씀해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창세기 7:2)

 

세상에! 한 쌍이 아니라 모두 아홉쌍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온 것은 흠이 없는, 소위 완전한 동물 뿐 아니라 부정한 것, 즉 흠이 있고 온전하지 못한 것까지도 방주에 태우셨다는 것이다. 

이 짐승들은 세상이 심판된 뒤, 새롭게 시작한 세상에 번성하고 유전하게 할(창7:3) 하나님의 디자인에 속한 생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 역시도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아가 탑승시켰을 그 동물들이 오늘날의 그것과 얼마나 같을런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온전하신 하나님이 꿈꾸시는 새로운 세상의 디자인 속에 흠 있고, 온전하지 못한 동물의 표본도 속해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살이다. 

 

 


 

세상의 흠. 세상의 약함.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우리는 모두가 약점이 없이 잘하는 세상만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시는 법이 없으시다(이사야 42:3).

그분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온전하고 강한 것들이 품고 돌보기를 원하신다.

그 약한 것이 존중받고 귀히여김을 받는 세상을 꿈꾸신다(고전12:22~23). 

 

그러므로 나는 오늘 담대하게, 감사하게 나의 약함을 그 분 앞에 오롯이 내어보인다.

나를 관용하시고, 품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히, 담대히 그 분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악함이 곧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분하고, 답답하고, 화가난다.

선인들의 노력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괜찮다.

세상의 부조리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분은 여전히 관용하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답도 없고, 효과도 없는 오늘 하루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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